知財權 보호미명 경쟁기업 퇴출수법 기승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29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3층 제356호 법정.

국방부와 (주)현대위아 관계자들은 민사12부 이두형 부장판사의 판결선고를 숨죽인 채 듣고 있었다.

법정을 짓누르던 팽팽한 긴장감을 뚫고 원고패소를 알리는 재판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방청석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의 군수업체 오토 멜라라 에스피에이가 현대위아를 상대로 낸 영업비밀침해금지 등 청구소송(2010가합81341)이었다.

오토 멜라라사는 “현대위아가 제작해 실전에 투입한 76㎜ 함포가 우리 제품을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영업비밀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위아 함포의 생산과 판매, 대여, 수출을 금지하고 모든 제품을 폐기하라”고 청구했다.

오토 멜라라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2009년 대청해전 당시 우리 해군 초계함에 장착돼 북한 함정을 격파했던 해군의 주력 무기인 76㎜함포를 더 이상 만들지도, 수출하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현대위아를 대리해 재판을 승리로 이끈 임성우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IT분야를 중심으로 불붙던 글로벌 기업간의 총성없는 특허전쟁이 이제 군수분야로까지 번졌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 기업을 겨냥한 글로벌 기업들의 특허전쟁이 점차 가속화되고 있다.

과거 불공정거래나 반덤핑규정 등을 활용해 견제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특허권 본연의 목적 보다는 소송으로 경쟁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려는 악용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원천기술을 놓고 벌어지는 특허공격은 우리 기업의 존립기반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변호사업계에서는 특히 중소기업을 상대로 한 글로벌 기업들의 특허공격이 전개될 것이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 지적재산권 전문변호사를 더 확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조원 상당의 손배배상 사례도= 지난 14일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지방법원에서 열린 코오롱인터스트리와 미국의 화학기업인 듀폰 간의 영업비밀침해사건도 특허권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이날 리치먼즈지법 배심원단은 “코오롱인더스트리가 듀폰의 아라미드 섬유의 업무상 비밀을 도용한 점이 인정된다”며 “그로 인한 듀폰의 손실이 9억1990만 달러(한화 약 1조원)에 이른다”고 평결했다.
아라미드섬유는 방탄복과 첨단무기제조 등에 쓰이는 고장력 섬유다.

코오롱은 지난 1975년부터 이 분야 연구개발에 뛰어들어 상용화에 성공한 뒤 현재 미국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중이다.

1조원 평결이 확정되면 코오롱은 사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코오롱을 위해 항소심 참여를 준비하고 있는 국내의 한 변호사는 “코오롱의 성장에 위기를 느낀 듀폰이 코오롱을 시장에서 몰아내려는 전략적 의도로 특허권을 악용하는 의도가 짙다”면서 “코오롱은 독자기술로 이 섬유개발에 성공한 만큼 항소심에서 철저하게 가려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국내기업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글로벌 기업들이 특허카드를 꺼내드는 사례는 심심찮게 발견된다.

지난 2008년 대법원 판결까지 무려 13년간 끌어왔던 미국 제지회사 킴벌리 클라크와 LG생활건강 등 국내업체 사이의 ‘기저귀 소송’을 비롯해 2006년에 시작해 2009년 확정된 일본 토넨사와 SK에너지 간의 리튬이온전지분리막 특허소송, 다국적 제약회사인 노바티스 아게와 종근당 등 국내 제약회사간의 특허소송, 지금도 진행 중인 오스람과 삼성LED간의 LED 특허침해소송, 최근의 애플과 삼성전자 특허소송 등이 대표적이다.

김원일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우리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글로벌기업들의 특허소송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 기술력이 그들을 위협할 만큼 발전했다는 의미”라며 “이제는 기술발전과 동시에 지적재산권의 확보와 관리에 정성을 기울일 때가 됐다”고 말했다.

국제적 특허분쟁이 앞으로 중소기업으로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미 발효한 한-유럽연합(EU)자유무역협정(FTA)등을 통해 국내 중소기업들의 해외진출이 크게 확장되는 만큼 이들에 대한 경쟁기업의 특허소송 공격이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다.

특허전문 로펌인 법무법인 다래의 조용식 대표변호사는 “우리도 이미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여러 건의 글로벌특허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상대적으로 지적재산권 관리에 취약한 우리 중소기업의 경우 조금만 방심하면 회사 존폐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김원일 변호사도 중소기업의 지적재산권 관리의 강화를 권고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우선 회사가 확보 가능한 지적재산권의 종류를 파악하고, 한국과 진출 예정국에 대한 적극적인 권리출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지적재산권 전문변호사 확충해야= 반면 글로벌 특허전쟁에서 기업을 대리해 전투에 나서야 할 지적재산권 전문변호사가 부족하다는 점은 문제다.

현재 국내 대형로펌 중 지적재산권그룹을 제대로 운영한다는 평가를 받는 곳은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법무법인 광장, 법무법인 태평양 등 일부에 불과하다.

법무법인 세종이 최근 코리아나 특허법인과 제휴 등을 통해 이 분야 강화에 나섰고, 율촌도 특허소송에 두각을 보이고 있다.

중형로펌으로는 KCL과 특허분야를 특화한 법무법인 다래가 손꼽힐 뿐이다.

이에 대해 조용식 대표는 “그동안 국내 지적재산권 사건이 그리 많지 않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지적재산권 분야의 전문성에 따른 높은 진입장벽도 주요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변호사업계는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다.

김원일 변호사는 “변리사 자격을 가졌거나 이공계 학문을 전공한 로스쿨생 수백여명이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이들이 나오면 중소기업을 포함한 국내기업의 지적재산권 보호에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권병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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