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불화의 전통기법 되살린 불교미술
무상불교미술원장 법여 최무상화백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찬란한 불교문화를 영구히 보존하고, 세상에 널리 알리면서 후학 양성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고려 불화의 전통기법을 되살린 불교미술로 비단을 쟁틀에 매어 배채와 복채를 한후 배접으로 마무리하는 무상불교의 미술원장인 법여 최무상화백.

최 화백은 비단 특유의 부드럽고 고풍스런 질감과 불화의 보존성을 높인 작품으로 세밀하고 고난도의 집중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설법이 변함없이 전해오며 우리들의 가슴에 남고 깨달음을 주듯이 불화도 부처님 말씀과 다르지 않기에 최선을 다하며 숭고한 뜻을 이어가고 있다.

법여 최무상 화백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듯이 이 몸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 하나를 위해 이루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박한 희망이다.

법여 최 화백은 “예술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붓을 위해 붓을 들지 않을 것이니 맺어진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일깨움이다.

법여 화백의 기술 전수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된 불화장 석정스님으로부터 전수받았다.

현재 8명의 제자를 지도하고 있는 법여 화백은 오는 8월에는 무상불교미술원 회원전을 10여일 정도 전시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법여 화백은 독보적인 자신의 배채법과 복채법은 물론 매우 난이도가 높은 비단을 씻는 작업과정 등을 연구, 그만의 노하우를 키워간다.

‘2011년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전’에 출품한 불국사 관음전에 모셔진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부처님은 세인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는 후문이다.

화제의 걸작을 그리기 위해 준비한 작업만도 장장 5개월이나 걸렸다는 귀띔이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또는 ‘천비(千臂)천안관음’의 ‘천’은 무량. 원만의 뜻을 상징한다.‘천수’는 자비의 광대함을, ‘천안’은 지혜의 원만, 자재함을 나타낸다.

1,000개의 손바닥 하나하나에 눈이 있어,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그 눈으로 보고, 그 손으로 구제하고자 하는 염원을 상징한다는 구전이다.

‘삼국유사’에는 분황사(芬皇寺)의 천수관음에게 빌어 눈먼 아이가 눈을 뜨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천수관음은 관음신앙의 유포와 함께 민간에 깊이 스며들어 소중한 인간의 정도를 이끌어 오고 있다.

경남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법여 화백은 동국대학교 불교회화과를 다시 거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통도사의 ‘성보문화재연구소’에서 불화반 조교로도 활동 중이다.

<불교미술은 어떤 佛畵인가>
대중들과 소통하고자하는 불화
벽화 탱화 사경화, 괘불로 세분

종교화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종교가 갖고 있는 교리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풀어 대중을 교화시키는데 있다.

불교회화 역시 종교화로서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에서부터 여러 부처님들을 시각화하거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풀어 대중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불교회화는 시대에 따라서는 크게 고려 불화와 조선 불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려지는 재료 등에 의해서 벽화(壁畵), 탱화(幀畵), 사경화(寫經畵)로 나눌 수 있고, 야외 의식용 불화인 괘불(掛佛) 등이 있다.

우선 시대구분에 의해 간략히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불교회화는 현재 고려시대의 사찰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전각과 연결시켜 설명할 순 없는 아쉬움이 크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불화들은 내세의 왕생과 구제를 기원하는 아미타여래도,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등이 주류를 이룬다.

수작으로 보전되는 불후의 명작은 석가모니불도, 비로자나불도, 오백나한도, 16나한도, 제석천도 등이 전하고 있다.

화려한 색채와 기법 등의 이유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많다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설명이다.

조선시대의 불교회화는 전각과 연결시켜 설명할 수 있다. 사찰의 전각 안에는 불상(佛像)과 불상의 바로 뒤나 전각의 내부 좌우벽면에 걸리는 불화(佛畵)가 있다.

전각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불화는 바로 불상의 뒤에 모셔지는 것으로 불상의 뒤에 걸리는 그림이라 하여 흔히 ‘후불탱화(後佛幀畵)’라 불린다.

탱화(幀畵 ‘幀’자를 불교에서 ‘탱’으로 읽음)는 불교의 그림을 가리켜 흔히 부르는 명칭으로, 대부분 전각에 그림이 걸려있게 되어있어 ‘걸려진 그림’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찰의 전각은 그 전각이 어느 부처님을 모셨는가에 따라 전각의 이름이 달라지는데, 마찬가지로 전각에 모셔진 부처님이 누구냐에 따라 후불탱화나 전각 내부의 그림의 종류와 성격이 달라진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경우라면 석가모니후불탱이 그려지고,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경우라면 아미타후불탱화가 그려진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각 내부를 불상을 모신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상단(上壇) 중단(中壇) 하단(下壇)으로 나누어 각 단에 걸리게 되는 그림의 종류와 성격을 달리한다.

즉 상단인 주불단에 메인이 되는 불화가 그려지고, 호법신을 그린 신중탱 등과 같은 그림들이 중단에 걸리고, 하단에는 영단(靈壇)이나 명부전(冥府殿) 등에 걸리는 그림이 모셔진다.

이처럼 어떤 부처님을 모시느냐에 따라 불화의 종류는 달라진다는 기록이다. 우선 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과 보살을 그린 그림, 그리고 불교의 신들을 그린 신중탱, 의식그림인 감로탱 정도로 격에 따라 다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의식을 중시하게 된 조선시대 사찰에서 드러나는 특징으로 고려시대의 불교회화에까지 적용된다고는 볼 수 없다는 구전이다.

이처럼 현존하는 불교회화들은 전각 안에 모셔지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림의 종류와 성격이 달라진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인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영산전(靈山殿), 팔상전(八相殿), 나한전(羅漢殿) 등이 있다. 이러한 전각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의 설법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석가모니 후불탱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전각의 차이에 따라 팔상전에는 영산회상도와 더불어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그려졌다.

나한전 등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걸리기도 한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비로전(毘盧殿) 등에는 비로자나불회도가 모셔진다.

약사부처님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에는 약사불회도가, 아미타부처님을 보신 극락전(極樂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미타전(彌陀殿)에는 아미타불회도 등이 모셔진다.

보살이 주존인 전각에는 관음전에는 관음도(觀音圖)가 그려지고, 지장보살이 모셔진 명부전(冥府殿)이나 지장전(地藏殿)에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그려진다.

주불이 누구냐에 따라 모셔지는 그림은 다르지만, 앞에서 지적하듯이 중단에는 그 전각을 지키는 호법선신을 그린 신중탱이 대부분 걸리게 된다.

벽화는 전각의 내벽이나 외벽 등에 그려지는 그림을 말한다.

전각의 구조에 따라 그려지는 장소가 달라지지만, 시기가 올라가는 벽화는 전각 내부의 공간이 상단을 중심으로 ‘ㅁ’자형인 경우 후불탱화가 걸리는 바깥벽에 그려지기도 하고, 좌우측 내벽에 그려지기도 한다.

또한 전각외벽에 그려지는 경우에는 선종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표현된다.

대규모의 그림을 조성하는 것 외에도 불교회화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사경의 표현이다. 사경을 조성하는 것을 ‘사성(寫成)’이라고 하는데, 즉 손으로 경전의 내용을 베껴쓰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 자체가 워낙 경제력 있는 계층에 의해 신봉되었기 때문에 불상, 불화 조성의 불사를 넘어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 자체를 직접 사서하여 조성하는 것은 실로 큰 공덕이라 여겼다.

실제적으로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사경의 수는 100여 점이 넘는다.

종이를 쪽이나 도토리 등으로 염색한 감지나 상지에 금은자로 사서하거나 머리그림을 금니로 그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경들은 고려불화의 그 유려하고 섬세한 미감과 같은 것이다.

불화의 성격과는 또 다른 불화로는 ‘괘불(掛佛)’이 있다.

괘불은 ‘거는 그림’이란 뜻으로 야외의식에서 사용하던 불화를 지칭한다.
고려시대에는 그 예가 없는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의식이 공공연히 야외에서 행해지면서 제작된 것이다.

야외의식의 규모 정도를 감안한 전각 안에 걸리던 불화의 크기와는 사뭇 다른 엄청난 규모로 제작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유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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