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좋은 곳에다 내 터전을 잡은 것 같다.
10여 년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개울물이 마른 적은 없다.
이 개울은 맨질맨질한 바윗돌들을 아주 넉넉한 품으로 보듬고 있다.

한편, 이 개울은 다슬기, 갈겨니, 버들치 등도 자유롭게 노닐도록 한다. 물은 내 농장을 휘감고 돌아간다. 마침 장마철이라 개울에는 넘칠 듯 물이 불어났고, 장마가 소강상태가 되자 물은 자정(自淨)되어 맑기만 하다.

나는 개여울에 때때로 나온다.
세수를 하거나 멱을 감거나 옷가지를 빨거나 다슬기를 잡거나 하며 한낮의 더위를 식힌다.

사실 물가에다 마루까지 갖춘 원두막(?)까지 지어두기는 했지만, 개여울 바윗돌에 앉아 발을 물에 담그고 쉬는 일이 더 많다.

개울 옆 밭둑에는 스무 살쯤 되는 감나무들이 늘어서 그늘까지 지어주고 있으니,이만한 쉼터도 그리 흔치 않으리라.

오늘 낮에도 개여울 바윗돌에 걸터앉아 있다.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흐르는 세월을 생각해 본다. 우리의 삶을, 언제고 흐르는 물에 비유하지 않던가.

아내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당신, 평생 청춘인 줄 아시나 보죠?”

그러고 보니, 나도 예순을 향해 흐르고 있다.
‘물은 왜 쉼 없이 아래로만 아래로만 흘러가는 걸까? 왜 흘러가야만 하는 걸까?’라는 아주 어리석은, 아니 엉뚱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그러다가 ‘法’을, ‘탈레스’를, ‘사이펀(siphon)’을, ‘베르누이(Bernoulli)’를, ‘물의 순환’을, ‘물 분자의 성질’ 을… 연쇄적으로 떠올리게 될 줄이야! 어쩔 수 없이 나는 수필작가임을 깨닫고 만다.

연상(聯想)과 ‘파고듬’의 재주가 있으니까. 머릿속, 그 정리 안 된 창고에서, 정작 내가 원할 적이면 솔솔 나와서 제법 정리가 되는 것도 요상한 일이다.

어쨌거나, 위에 열거한 명사(名辭)들을 통해서 색다른 수필 한 편을 꿰어 맞출 수도 있겠다. 사실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다.’는 말도 이젠 너무 식상(食傷)하다. 피상적으로 물을 노래하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난다.
자, 이제 슬슬 꿰어맞춰 보기로 하자.
이 글 도입부가 제법 ‘비단결’이었다면, 지금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삼베결’이다.

그러니 ‘한결’같지는 않다만… .
法. ‘물[水 ; 三水邊]이 가는(흐르는) 대로[去]’ 아주 자연스럽게 운용되어야 할 게 법이거늘, 요즘 세상이 어디 그렇던가. 죄다 마음 내키는 대로 아니던가.

나는 잠시 법무법인에 근무한 적도 있다.
민사(民事)는 소송 당사자가 각각 능력 있다고 여기는 소송 대리인, 즉 변호사들한테 사건을 맡기고 뒷돈(?)을 대어주며 싸움을 붙이는 게 다반사였다.

어릴 적 들판에서 소싸움을 붙여놓고, ‘우리 소 이긴다! 우리 소 이긴다!’ 응원하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가관이었다.
법률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웃기는 일이었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법은 정의의 편이 아닌 것 같아 씁쓰레하다.

즉, 물 흐르는 대로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순억지다.
끝끝내 내가 현실참여에서 한 발 빼고 지낼 수야 없지 않은가. 그래도 시류(時流)에 따라 살아가는 게 편하다고? 난 차라리 ‘시류’가 아닌 ‘시루’에 떡이나 찌겠다.

탈레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다. 그는 만물의 근원(아르케)은 물이며 대지는 물 위에 떠 있다고 믿었다.

옳은 말인 듯싶다.
철학자에 따라 만물의 근원을 흙으로, 원자로, 불로… 제각기 보았지만, 탈레스의 주장은 퍽이나 인상적이다.

내 아버지의 물과 내 어머니의 물이 만나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니까.
나아가서, 물은 이 지구상에 71%를 차지하고, 내 몸 속 물도 그 정도의 비율일 테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 지구 아니, 우주의 축소판이임을 유추할 수 있다.

하여간, 일찍이 탈레스는 만물의 물 기원설을 주창했다.
사이펀(siphon). 높은 곳에 있는 물을, 담긴 그릇을 기울이지 않고 낮은 곳으로 옮기는 연통관(連通管)을 일컫는 말이다.

이 사이펀 원리는 흔히 이용하고 있다.
중간에 장애물이 놓인 곳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

위험 액체를 제법 이격(離隔)시켜 옮길 때도 만판이다. 이 사이펀의 원리를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잠시 후 ‘베르누이’에서 이야기하겠지만, 높은 곳과 낮은 곳 유체(流體)의 압력 차 때문에 유체 흐름이 가능하다.

물은 압력이 낮은 곳으로 달려가기를 원한다.
물은 진공 상태인 곳으로 급속히 빨려가서 그 빈 공간을 채우려는 성질이 있다.

이는 우리가 빨대로 주스를 빨아마실 때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베르누이’. 물리학자 베르누이는 그 유명한 ‘베르누이정리(Bernoulli’s theorm ; 베르누이 定理)’를 제창했다.
유체의 흐르는 속도와 압력, 높이 관계에 관한 사항이다. 유체의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합은 언제고 일정함을 나타낸다.

달리 말하자면, 유체의 속력이 빠른 곳은 압력이 낮아지고 그 속력이 느린 곳은 압력이 높아진다는 내용이다.

연이나 비행기가 뜰 수 있는 것도 날개 위 아래의 유체 속도의 차이 때문임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물(유체)은 위 단락에서 밝혔듯이, 압력이 낮은 곳 또는 진공상태인 곳으로 속히 달려가서 그곳을 꽉꽉 채우려는 습성이 있는 게 분명하다.

물의 순환. 물은 지구상에서 기체, 고체, 액체로 존재한다. 이들 삼태(三態)로 자유자재 둔갑한다.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었다가 강물이 되었다가 수증기가 되었다가 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재주가 대단하다.

요술쟁이다.
이러한 물의 순환과 더불어, 이선희의 노랫말 대로 ‘우리는 이 땅 위에 우리는 태어났고’다.

물의 성질. 물은 투명하다.

물은 액체에서 고체가 되면 부피가 늘어난다. 물은 열용량이 크며 열전도율이 높다. 물은 자연상태에서 기체, 고체, 액체 세 모습으로 존재한다. 물은 만능용매다.

물 분자의 성질. 사실 나의 이야기는 이 단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위에서 주욱 이어서 소개한 사항들은 모두 이 ‘물 분자의 성질’에 수렴(收斂)되고 만다.

요컨대, 물 분자는 변덕쟁이다.
혼자일 때는 이웃하는 물 분자와 손잡기를 원한다. 어울려 일심동체 아니, ‘일심동테(一心동테)’가 되어 데굴데굴 굴러가기를 원한다.

그러기에 이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무슨 이야긴고 하니,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뒤쳐진 물 분자가 앞선 물 분자를 붙잡으려는 데서 물 흐름이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앞서가는 물 분자가 뒤쳐져 오는 물 분자의 팔을 잡아당겨줌으로써 물이 끊임없이 흐른다.
물 분자는 막상 어울려 물을 이루다가도 홀연히 떠나고자 한다. 혼자이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수증기로 변신하는 게 그 좋은 예다. 이렇듯 물 분자는 변덕을 부린다. 물은 한 곳에 갇혀 있으면 어찌해서라도 그곳을 벗어나려고 하고, 홀로 되면 함께이기를 원한다.

나는 그러한 물의 변덕쟁이 습성으로 하여 흐르는 개울물을 내려다 보며, 이렇게 호젓이 개여울 바윗돌에 앉아 있건만, 그러한 사실을 왜 진작에 몰랐던고? 나만 변덕쟁이 습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더니만… .

이은상(李殷相) 식으로 말하자면, ‘때묻은 소매를 보니 아내 더욱 그립다.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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