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녹음, 그 초록 위에서 반사되는 햇볕은 흰색이었다.

이제 가을의 초입에서 겸손한 녹색 잎들 위에 내려않은 햇살을 보노라면 햇볕의 색깔은 황색임을 안다.
한낮의 가을볕이 따갑다고 하지만 이미 눈부신 백색은 아니다. 피하고 싶지 않는, 정겨운 담황색이다.

파란색 하늘이 높아진 오늘 아침에 숲 속을 파고들어 길 위에 얌전히 앉은 햇살 또한 황색이었다.
황색은 결실의 색이다. 결실이 있기에 그 아름다움이 생명력 있게 보이는 것, 그것이 황색의 미학이다.

벼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는 논은 녹색과 황색이 혼재해 있다. 아직 벼 잎들은 녹색이고 나락들은 황색이기 때문이다.

색상이 우리 마음에 주는 느낌은 매우 상대적이어서 가령 녹색이 젊음의 상징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에서의 푸른 기운은 눈에 거슬린다.

실제로 차창 밖으로 더 완연한 황금빛을 기대하면서 내다보는 논들 중에 띄엄띄엄 푸른 기가 있는 늦된 논이 보일 때는, 설익어서 풋내 나는 과일을 대할 때처럼 싫은 것이다.

9월의 마지막 휴일쯤, 우리는 푸르른 잔디가 누렇게 변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황색은 고사(枯死)의 색깔이다.
식물에 있어 대체로 고사의 색깔은 갈색이지만 이처럼 황색도 때로는 고사의 색깔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황색이 새 생명의 색 또는 새 생명을 준비하는 색이라는 점에서 나는 황색의 신비를 다시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무를 관찰하여 겨울옷을 입은 채로 봄을 기다리고 있는 새싹의 속살을 훔쳐보면, 생명의 색은 담황색임을 안다.
탄생은 하였지만 강보에 싸인 아기도 담황색이다. 젖내음의 색깔 또한 담황색이 아닌가.

햇볕 쏟아지는 논, 그 축복의 풍광을 보노라면 조선시대의 풍속도 한 점이 떠오른다. 달력에 인쇄된 것이지만 액자로 만들어 10여 년 동안이나 현관에 걸어두었던 그림이다.

출근 때 집을 나서면서 자주 그 그림을 쳐다보곤 했었다. 그림의 내용은 햇곡식으로 만든 음식상을 동네 노인들이 받고 흐뭇한 얼굴로 앉아 있는 한 농가의 잔치 풍경이다.

부농인듯한 그 집의 울 밖에서는 아낙들과 아이들이 안마당을 넘어다보고 있다.
그 그림을 내가 좋아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음식을 만들거나 나르는 부인들의 옆얼굴과 울 넘어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까지, 그림에 담긴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 행복감과 미소가 담겨져 있는 것이 그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밥그릇에 수북이 담긴 고봉의 밥이었다. 밥그릇 높이보다 더 높이 담아 올린 밥!

내가 고봉의 밥을 좋아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당시 다니던 회사인 D그룹의 K회장님.

그분은 젊었을 때부터 밥을 고봉으로 담은 생일상을 받는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신입사원을 직접 면담하던 창업 초기에는 아침식사를 얼마나 하느냐고 물어보아서 한 그릇 다 비운다고 답해야 채용했다는 일화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며, 일 많이 하기로 정평이 났던 회사이고 보면 납득이 가는 말이다.

그 분 자신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해 보겠다고 자주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우리는 일했다.

고된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내 마음에 뿌리내린 것은 고봉의 밥은 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상징적으로, 일이 고달팠기 때문에 그렇게 믿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갈색의 계절이 오기 전에 추석 한가위가 있음에 나는 감사한다. 그리고 명절 음식이 푸짐한 것을 보고 자란 나는 음식이 남을 정도라야 집에 복이 찾아온다고 믿고 있다.

액자에 담아 걸어두었던 그 풍속도는 바로 D그룹의 달력에 실렸던 그림이다.
기획시리즈로, 단원 혜원 등의 풍속도 12폭씩을 해마다 달력에 담아 수년 동안 소개한 것 중의 하나였다.

음식 만드는 일에 취미가 없고 명절 음식도 약간 모자라는 듯이, 알맞게 준비하는 아내에게 나는 명절 때마다 불평이다.

나의 위대(胃大)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진 상을 보면 풍년의 논, 나의 사랑하는 황색호수를 연상하는 것이다.

저녁때는 노을의 반사를 받으며 붉은 기운마저 드리우는 황색호수.

우리와 같은 쌀의 문화권에 속해 있는 베트남의 기업인이 회사에 들렀던 며칠 전, 연구소를 둘러보고 공장으로 이동하는 3층 계단에 서서 탁 트인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풍경을 보면서 그가 한 말은

“오, 풍요롭고도 평화로운 광경!(Scene of plenty and peace!)”이였다.

가을비 한 번 흠뻑 내리면 나뭇잎들은 서둘러 갈색 옷으로 갈아입고, 이 황색호수의 물결도 차츰 사라질 것이다. 나는 지금 차를 버리고 호수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황색은 영감(Inspiration)의 색, 영감은 블랙에서 준비하다가,짙은 옐로우에서 분출한다.

반사하는 화이트에서는 달아나 버리고…….

황색호수에 황색 햇살 가득 내리니
오! 찬란한 황색의 잔치.

따뜻함과 풍요와 평화가
출렁이는 황색호수.

백색 햇살 눈부시던 여름에는차라리 졸립기만 하던 영감이 황색 위에서 일렁임을 본다.

젊음을 완성한 황색 위에서.
<서병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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