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만 종친 경주이씨 대종회 명문집안 정평
始祖는 알평(謁平)이며 本貫은 慶州
경주이씨중앙화수회 瑞峯 李弼雨 會長

미국의 존.F.케네디家와 영국의 ‘British Monarchy’을 귀감으로 한국판 명문계보를 잇고 있는 경주李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만치 자긍심 또한 지대하다.
반세기를 이어오며 국내 명문가로서의 국가적 존엄과 위업을 달성해 온 권문세가는 오늘날의 한국 정치와 경제계를 선구하며 가풍을 누리고 있다.
이에 350만 종친을 거느린 경주 李씨의 이필우(11대 전국회의원) 회장을 만나 명문대가의 진면목과 배출된 인물, 그리고 선조들의 훈육에 대해 재조명해 본다.<편집자 주>

경주李씨는 신라 창건의 원훈이신 ‘알(謁)’자 ‘평(平)’자 선조를 시조로 모시는 국내 최고 명문집안으로 그 명성을 얻고 있다.
경주이씨(경주이씨중앙화수회장 이필우)들은 예로부터 신라, 고려, 조선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일취월장하며 국난에 처해있을 때마다 앞장서 구국의 대업을 일구며 창사에 길이 빛난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는 앞서 중앙화수회 대강당에서 ‘2013 癸巳年 인사회’를 갖고 종친간에 우의를 돈독히 다졌다.
경주이씨는 지난 1946년 3월26일 초대부통령을 역임한 성재 이시영선생에 의해 중앙화수회를 창립,오늘에 이른다.

경주이씨는 본관지인 경주에 시조 알평의 사우 표암재(瓢巖齋)를 관리하는 표암화수회(瓢巖花樹會)와 서울특별시,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제주도에 각 ‘시-도화수회’를 두고 전국 시,군,구화수회를 운용하고 있다.

이상빈화수회 사무총장의 진행으로 개시된 당시 인사회에서 이필우회장은 전국에서 신년인사에 참석한 ‘종친들의 모든 가족의 건강을 바란다’며 ‘명문 경주이씨가 힘을 모으면 못 이루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덕담을 나눴다.

이 회장은 특히 전 이승만대통령이 말한 “뭉치면 살고 흐터지면 죽는다”라는 격언을 상기하며 “서로 돕고 사랑으로 협조,소통하는 좋은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350만 종친의 행운을 바란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이어,“경주이씨는 명문거족의 긍지와 명예를 드높여 더욱 발전해 나가도록 뜻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평생을 ‘나눔과 봉사’를 덕목으로 삼고 있는 원칙주의자로 수범을 보인다는 전언이다.

이 회장은 이어 “온고지신이란 말이 있습니다.”우리 조상들께서 걸어오신 길과 그 숭고한 뜻을 잘 본받아 더욱 부흥시키는 것이 진정한 명문의 계승이며, 발전이라 믿는다”고 역설했다.
‘경주이씨중앙화수회’는 창립이래 60여년의 세월을 지내오면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다.

근대로 접어든 1945년 8월15일 광복후에는 이시영초대부통령에 이어 제17대 이명박대통령을 포함 이만섭전국회의장, 이용희국회의원, 이재오국회의원, 이철우국회의원, 이윤석국회의원, 이장우국회의원, 이상훈전국방부장관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로 손꼽힌다.

또한 경제계에서는 글로벌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킨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이 대표적인 인물로 지칭된다. 남부럽지 않은 규모의 화수회 회관도 마련했다.
 
시조의 탄강지를 정비해 후손들에게 조상을 모시는 존엄성과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종문성지를 만들어 가고 있다.
명문집안에서 명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같은 가풍을 이어받은 서봉 이필우 회장은 국회의원은 물론 동일그룹 최고경영자 등을 통해 일평생 봉사와 나눔으로 일관해오며 주변에 귀감이 됐다.
서봉 이 회장은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모르는 뚝심의 승부사로 정평이 나 있을 정도이다.

사단법인 충북협회장 등을 맡으면서 패기넘치는 추진력을 발휘하며 협회장의 막중한 소임을 빈틈없이 노익장을 과시한다.
타협과 조정보다는 원칙을 앞세우는 그의 소신앞에 한 때는 호평과 혹평을 듣는 이중고를 겪었다.

그러나 머잖아 일말의 혹평을 깨끗하게 불식하고 진정한 종친과 충청북도의 어르신으로 각계로부터 존경을 받기에 이르렀다.

서봉 이필우회장은 충북 영동군 추풍령에서 경주이씨 익재공(제현) 21대 손으로 태어나 충북에서 유년시절을 보낸다.

29살이 되던 1953년 꿈많은 청년에게는 인생의 항로를 뒤바꿔 놓은 운명적인 한해로 거슬러 오른다.

‘바다의 왕자’ 대한민국 해군을 전역하고, 전국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인다는 서울로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했다.
혈기왕성한 그 시절 4.19와 5.16을 겪으면서 신념과 긍지 속에 패기와 야심을 불태웠다.

이 회장은 수많은 고충과 경험을 되살려 1965년에는 택시운수업에 뛰어 들었다.
1972년 ‘LPG가스택시상용화’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가 장본인이다.

운수업계의 대부가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안돼 사업을 일으키며 굳건히 성장가도를 달렸다.
사단법인 경주이씨 충북협회장과 경주이씨중앙화수회장을 흔들림없이 이끌며 종친사랑과 애향심으로 헌신해 왔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아래 추진력과 결단력이 남다른 경영철학을 무기로 질곡의 삶을 무난히 헤쳐나갔다.

과거 유년시절에 한문공부와 무언가 몰두하는 연구방면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만치 소질이 뛰어났다.
부유한 대농의 집안에서 자란 그는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신념과 정의로움에 이웃이 동화하는 솔선수범의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어느정도 지덕체의 발판을 굳힌 그는 정치인되어 어려운 서민을 위해 일하는 것과 대기업의 최고 CEO가 돼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는 선견지명의 결심을 더했다.
이 회장은 이후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라 있던 1973년 명문 고려대 경영대학원의 총학생 회장을 거친후 1983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한다.

뒤이어 서울대 경영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한 이 회장은 1994년 고려대 국제대학원 최고관리과정을 수료하는 등 늦깍이 향학열을 불태웠다.

그는 앞서 1976년 민주공화당 강남지구에 입당한 후 영동라이온스클럽을 창립하고, 같은해 7월 민주공화당 중앙위원 강남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뜻을 펼치게 된다.

대학시절 정치인의 꿈을 품었던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 정직한 사회’를 향한 비전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오늘이 있도록 해준 고향 충북의 발전을 위해 봉사할 때가 됐다는 강한 소명의식에 이필우 회장은 주저하지 않았다.

특유의 청백리 품성과 친화력을 발로 누비며 마침내 1981년, 한국국민당 전국구로 출마해 11대 국회의원으로 금배지를 달게 됐다.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국회와 당을 오가며 의정활동에 온 열정을 쏟아 붇는다.

이필우 회장의 열정적인 모습을 바라본 주위의 정치인이나 언론에서는 ‘뚝심의 정치인’ ‘의리의 사나이’ ‘大義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불사하는 정의파’라며 칭송이 이어졌다.

이후 그는 4년의 의원 활동을 마치고 다시 동일운수주식회사 회장으로 취임하면서도 여전히 왕성한 사회봉사 공헌활동(CSR)을 전개했다.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바르게살기협회’의 자문위원장직을 수행했으며, 2004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수상했다.

‘바르게살기협회’를 통해 이 회장은 불우한 이웃들에게 1990년부터 2010년까지 1인당 100만원씩 무려 20여년간 10억원 상당을 기부하는 나눔문화를 실천했다.

2006년부터 8대 충북협회 회장을 맡아온 이필우 회장은 12개 시.군 향우회에 발전기금을 전달했으며 2009년 충북인의 밤 행사를 통해 무려 3억원의 발전기금을 쾌척하는 애향심 발로의 수훈을 남겼다.

충북 출신 재경인사들의 친목 모임인 ‘사단법인 충북협회’는 지난 반세기 남짓 정-관계 인사를 중심으로 설립, 고향사랑의 모토를 일깨워 준다.

도민회 성격보다는 서울에서 자리잡은 선배 출향인들이 중앙정부기관으로 발령받은 후배들을 지원하는 차원이 효시를 이룬다.

중앙정부기관으로 발령받은 후배들을 가능한 선에서 후원하는 조그만 미덕이 오늘의 결실로 성장하며 지속가능한 조직으로 자리잡았다.

이필우 회장은 줄곧 대전시향우회, 충남향우회가 다각도로 활동하면서 정통의 충북협회가 충북도민회 역할을 하도록 계승했다.

한편, 이 회장은 동일스포츠클럽의 CEO로 몸담고 있는 도화수여사와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Tip><경주 李씨는--->
문중의 名門 여섯집 대파(大派)의 종회(宗會) 가운데는 가장 현달(顯達)한 家門부터 별칭이 있는데, 상서공파의 오신(五臣)집이 있고, 오신 집속에 백사(白沙)집이 가장 두드러지며 그 다음으로 익재공파의 팔별(八鼈)집이 있다.

팔별집 후손에 좌의정 경억(慶億)의 화곡(華谷)집이 두드러지고 국당공파의 팔정(八廷)집이 있고 팔정집속에 우의정(右議政) 완(浣)의 매죽헌(梅竹軒)집 등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족보와 항렬
경주 이씨의 세보(世譜)는 숙종 10년(서기 1684년)의 갑자보(甲子譜)·영조 24년(서기 1748년)의 무진보(戊辰譜).순조 14년(서기 1814년)의 갑술보(甲戌譜) 등 세 대동보(大同譜)를 갑무갑 3대보(甲戊甲 3大譜)라고 부르며 그후의 모든 소지(小誌.족보의 기록)의 연원을 삼고 있다.
최근의 대동보로는 서기 1987년의 정묘보(丁卯譜)가 있다.

경주 이씨의 항렬(行列)은 35세(世)까지는 갑자보에서 정하였고, 35~70세까지는 고종때의 영의정이었던 귤산공(橘山公) 유원(裕元)이 제정했다.

시조에게 내린 시호와 왕의 칭호
시조에게는 다음과 같이 시호와 왕의 칭호가 내리고 유허비,재실,묘우가 건립됐다.
신라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시조에게 이 씨(李 氏)가 하사되고 법흥왕 23년(서기 526년)에 ‘문선(文宣)’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렸으며 태종 무열왕 3년(서기 739년)에 ‘은열왕(恩烈王)’에 추봉(追封)됐다.

조선 순조 6년(1806년)에 신라를 건국하고 박혁거세왕을 추대한 사실(史實)을 새긴 유허비를 금강산의 표암봉(瓢巖峰)에 세웠다.
서기 1925년에 표암재(瓢巖齋)를 건립한데 이어 1971년에 알평시조의 묘우(廟宇)인 악강묘(嶽降廟)가 국고지원으로 건립됐다. <BIZ팀>

<프로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총학생회장/서울특별시 강남구 정화위원장/민주정의당 강남지구당 위원장/제11대 국회의원(한국국민당 재정위원장)

△현 충청북도도민회장/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총동창회장/현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회장/현 재단법인 충북협회장학회 이사장/현 재단법인 표암장학회 이사장/현 재단법인 유지재단 이사장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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