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석선 선생님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에게 대단한 매력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호감을 가질 수도 있다.
적어도 그가 나쁜 일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무엇이란 준수한 용모와 탁월한 연기력일 수도 있고, 타고난 목소리에 심금을 울리는 놀라운 음악성일 수도 있다. 불굴의 투지력과 위대한 카리스마로 단기간에 광대한 땅을 힘으로 점령한 위대한 정복자일 수도 있다.
뛰어난 발재간으로 네모난 박스안에 기가 막히게 볼을 집어넣는 신적인 기술로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끄는 스포츠 스타일 수도 있다.
천부적인 재능과 우수한 두뇌에 의한 창조적인 경영으로 글로벌 갑부로 일약 등장한 성공적인 경제계의 거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동적 능력들이 우리들의 삶의 근원적인 변화를 자극하는 동력이 되기까지에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감동을 주기에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정신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게 하는 충격을 줄만큼 존경심을 자아내게 하는 어떤 힘과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당대의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켜왔던 매력적인 사람들도 한 세대만 지나가면 인기도 명성도 흐릿해지고 시대의 담을 넘어가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 그의 세기적인 능력이 불후의 업적으로 남아서 그 이름과 명성이 오랫동안 전달되어진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양심을 각성시켜 참다운 삶의 가도를 힘차게 걸어가게 해 주는 그런 능력과는 대부분 무관했다.

오히려 당대에는 그다지 대중적인 매력을 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거나 심지어는 기존의 지배계층이나 영향력 있는 보수적 대중에게 배척을 받거나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이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들의 양심의 밑바닥에서부터 부끄러움을 자아내게 만들고 선한 양심을 일깨워 인간다운 인간으로 뿌리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힘은 무엇일까?

가슴과 사상이 달랐던 위인들

‘악법도 법이다’면서 기꺼이 독배를 마셨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수십 세기를 지나면서도 위대한 성인으로 기억하고 존경하지만 당시의 절대권력을 가진 왕의 이름이나 그 악법을 집행했던 검찰총장의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뿐더러 알려는 관심도 없다.

그보다 약 1세기전에 태어나서 당시에 별로 유명한 자도 못되었고 그다지 높은 벼슬도 못해 본 공자나, 공자보다 약 반세기 먼저 태어났던 석가도 모두 25 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들의 가슴속에 담긴 사상과 생애의 감화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되고 생애의 노정에서 사람의 마땅한 도리로서의 길을 밝혀 주는 영향력이 꺼지지 않고 있지만 당대의 왕들의 이름이나 거부의 명단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더구나 기원전과 후를 갈라놓았던 역사적인 인물, 새파란 30초반 총각 선생 예수의 불과 3년 동안의 짧은 활동과 몇 차례의 강의록과 틈틈이 던져준 몇 자락의 촌언(寸言)들로 남겨진 기록들이 20여세기를 인류의 정신과 문화와 사상과 생활에 미친 결정적인 파워는 당시의 그 나라를 포함한 수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글로벌 제국 절대군주의 이름이 시이저 몇 세인지 기억도 하지 않는 로마황제의 영향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들이, 어두운 세상에 사람들의 가슴속에 마음과 정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주는 위대한 인류의 스승 내지는 성인으로서 존경심이 자리 잡도록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GDP는 계속 성장하고 문명의 혜택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자꾸만 부패해가는 정신과 문화의 파괴적 성향, 더욱 메말라가는 인간성 상실과 더욱 끔찍해져 가는 생명파괴 행위의 만연 속에서도 사람들의 양심 속에 잠재된 도덕성을 각성시키면서 인류로 하여금 그나마도 이만큼 양심과 선의 세력이 인류의 생존과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도록 하는 오래 전에 이미 이 세상에서 없어진 그들의 큰 영향력은 무엇일까?

물론 그들의 권력의 크기가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부나 재능의 탁월성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었다. 말솜씨나 글솜씨가 세기적인 인물로 만든 것도 아니었다. 그들보다 더 멋있는 말솜씨를 가진 사람들도 부지기수이고 그들보다 더 많은 글재주로 엄청난 족적을 남긴 사람들도 많다.

그렇다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도 살려내는 위대한 초능력이 사람들의 가슴속 양심을 일깨우며 존경심으로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위대한 원동력이 된 것도 아닌 듯하다. 청년 예수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충격적인 기적들을 많이 일으켰다고 하지만 그 옛날 모세의 기적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거저 경상남북도만한 지역에서 촌뜨기 몇 명을 데리고 걸어서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 전부이다. 제자라고 남은 것이 고작 100여명에 불과했다. 공자님이 전성기 때 제자가 약 3천명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웬만한 중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학생 수 정도 밖에 안 된다. 그 나마도 공자님의 진짜 남은 제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직접 만나보고 관찰할 수는 없지만 기록을 통해서 젊은 날 동안 그런 위인들의 가슴속을 들여다보고자 노력했다. 기록에 나타난 그들의 행동과 말과 생활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속에 녹아져 있는 생각, 그들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전 생애를 결정해 주었던 사상의 위대함이 그들을 보통사람들과 구별하게 하는 위대한 속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의 가슴속에 담겨진 사상과 욕망, 소원과 생각의 크기가 그들의 가슴의 크기를 결정했고 위대함의 크기를 결정해 주었다. 당연히 그들의 사상은 그들의 생애를 꼴 지워 준 것은 물론이고 시대를 관통하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사상과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인간의 고통과 불행에 대하여 온 몸과 맘으로 느끼는 아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통찰, 그리고 모든 인류가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타고난 최고의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고통과 불행의 피의자가 아니라 피차 행복의 기여자로서 사이 좋게 공존 공생할 수 있는 길에 대한 탐색과 목숨을 건 시도가 그들이 뿌린 사상과 생애의 씨앗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그들의 가슴과 생애는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양심에서부터 도전과 동시에 존경심을 일으키기에 족한 것 같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기적 위인들의 가슴속을 탐색하는 나의 시도에 종지부를 찍게 한 분이 있었다. 그 분이 바로 석선 선생님이었다.

그 가슴속을 보고 놀라다

사람들이 죄를 이긴 생애의 근본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자신과 세상을 위한 행복과 축복의 통로가 될 수만 있다면, 열흘 동안 하루에 열 시간 이상 되는 강의를 100차례가 넘도록 목숨을 딱 내어놓고 외치는 그 열정과 희생도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찍이 지구환경회복운동과 생명회복운동으로 유기농업운동을 시작하고 국내외에 수십 개의 유기농장을 설립 운영한 것도 예삿일은 아니었다.

국가와 인류의 미래는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의 성공여부에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온 인류를 가슴에 품는 홍익인간으로의 완성을 교육목적으로 지향하는 왕따, 폭력, 죄가 없는 대안학교의 설립과 운영 또한 놀랄만한 일이었다.

가정과 민족이 바로 서는 것이 근본임을 통찰하고 자녀교육과 부모효도운동, 그리고 고려인돕기운동 등에도 일찍이 선도적인 활동을 실행한 것도 아름다운 일이었고 대한민국의 미래 식량안보와 식품안전을 위한 해외유기농장 확보에 일찍이 집중적인 투자와 개척을 시도한 것도 선견적인 안목의 판단과 결정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분의 이러한 행적들이 정작 나로 하여금 초세기적 경탄과 충격으로 다가오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실천의 규모와 양에 있어서는 더 크고 많은 업적들을 남긴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다. 웅변적인 설교는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더 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셨다고 하지만 더 많은 장서를 저술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사모님과 함께 일생을 거저 남을 위한 봉사와 구제사업이 일상생활이 되다시피한 삶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규모에 있어서 더 많은 봉사의 생을 살다간 사람들도 많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분의 가슴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내가 받은 경탄과 충격이다. 똑 같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 가슴속에 담겨진 세계의 크기와 사상의 위대함이 이렇게 천양지차로 차이를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놀람이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인생들을 낳아서 키우는 친부자지간의 관계로 소개해 주었던 것처럼 실재 그대로 하나님을 완전한 친아버지로 결합되어 버린 그분의 가슴에는 모든 인류는 피를 나눈 한 아버지안의 친아들딸들로서 가슴에 완전하게 연결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고통과 불행은 당신 자신의 고통과 불행으로 그대로 느끼는 아픔이었다. 반면에 언제나 거짓이 없고 변함이 없는 자연만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듬직한 바위와 늘 푸른 소나무와 항상 겸손하게 내려가는 자기가 없는 물친구들은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인생들과 가질 수 없는 진짜 완전한 절친이었다.

뒷산의 다람쥐와 추녀밑을 찾아오는 산새들과 집냇가의 물고기들에까지 쏟아주는 진지한 애정은 그냥 모양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장난감으로 주신 귀여운 친구들을 어떻게 입으로 넣을 수 있느냐고 절대로 고기도 생선도 입에 대는 법이 없었다.

하나님을 진짜 친아버지로 모시고 완전히 하나로 결합된 그분의 가슴에는 마음에 부족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땅에도 하늘에도 이생에도 내세에도 당연히 욕심 같은 것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에게는, 세상의 부귀영화나 하늘의 영생이나 구원이나 천국 같은 것은 일절 소원이 되지도 않았다.

물론 돈이나 재물 달라고 복달라고 구원과 영생 달라는 기도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위하여 땅 한때기라도 준비할 이유는 당연히 없었고 당신의 가족과 자녀들과 다른 가족과 자녀들에 대한 차별이나 특별한 편애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그분의 행동이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혹 있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그분의 일생의 생애의 면면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다른 더 절박하고 중요하고 심장이 터지는 갈망과 욕망 때문에 여타의 어떤 욕망도 가슴에 들어올 틈도 없어 보였다.

돈이나 영광이나 예배에 굶주린 이상한 하나님처럼 오해 받고 있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원통한 누명을 벗겨드리는 것과, 불쌍한 하늘 부모님의 슬픔과 눈물을 닦아드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모든 인생들이 하늘 부모님의 품 안에서 참된 자유와 행복과 평화를 누리면서 친형제로서 서로 우애하며 살아가는 하나의 가족으로 회복될 수 있다면, 그 분은 백 번을 죽어도 좋았고 천 번 생명을 버릴 것이 요구된다고 해도 아무것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한 세상과, 인생들의 슬픔과 고통, 피차에 대한 투쟁과 학대와 불행을 바라보는 것이 그 분의 한이고 원통이고 죽음이었고 날마다 순간마다 연속된 일생의 부르짖음과 호소이었다는 것은 그와 함께 해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양심으로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일생을 날마다 한결같이 하늘 향해 절규로 호소한 기도에는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은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직 기도는 인류를 고통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와 흑암의 세력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었고 불쌍한 하늘 친아버지와 죽어가는 인류에 대한 몸부림과 비명의 세월이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역사적으로 큰 가슴과 하늘과 연결된 도의 경지를 걸어갔던 위인들의 가슴속까지 접근해서 그 중심에 담긴 것을 확인해 보려는 시도에 젊은 날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이분의 가슴속에 담긴 것과 같은 하늘과 땅의 불행의 본질을 통찰하고 그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한 열정과 고민으로 이렇게 온 마음과 혼과 육체를 통째로 던지는 분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보이지도 않는 하늘 아버지를 마치 육신의 부모님 이상으로 친근하게 사랑하고, 이처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충성하는 사람은 역사상 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매사에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그 분의 뜻대로만 행하였지 자의대로 행하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힘들고 수치와 죽음의 위협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순종했고 아무리 좋은 조건과 유익이 훤히 보장되어 있어도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면 주저 없이 거절했다. 아무리 어렵고 큰 우환을 당한다 해도 일생 동안 한 번도 입에서 불평이 새어 나오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무엇에든지 항상 감사밖에는 없었다.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고 인류에 대한 사랑이 컸던 만큼 반면에, 하나님의 마음을 고통케 하는 현실과 인류의 행복과 생명을 파괴하는 죄와 불법과 악마의 세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단호했고 분노가 컸고 원통이 컸다. 나는 인류의 역사상 어느 누구의 가슴속에서도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을 위한 이런 종류의 터지는 비명과 절규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이런 마당에 세상의 그 무엇이 그 분에게 유혹이 될 것이 있으며 무슨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며 무슨 얻고 싶은 영광이 있을 것인지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내 교파만 복 받고 구원받고 천국간다 하는 소리는 귀를 닦을 소리가 되어 버렸다. 그분의 고백 중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너도 살고 나도 살자, 너도 영생, 나도 영생하자 하는 자들은 욕심쟁이 산적들이 값진 보물을 탈취해 놓고 자기 욕심을 마음껏 채우기 위해 뜨더귀판을 벌이는 협잡꾼들의 모습이지 결코 참 道의 경지를 걷는 자들이 아니다.

참 道의 경지는 자기의 유익이나 자기의 삶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지 아니하는 것이다.
참 道의 경지는 자신은 영원히 죽어 사라지는 편을 택하여 기꺼이 사라지면서 불쌍한 인류를 위하여는 장생불사의 낙원에 꼭 들어가 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숨지면서 탄원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면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인류애는 한이 되고

내 가족 또는 내 자녀 중 하나가 범죄와 악의 희생물이 된다면 그래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위협 속에 사로잡혀 있다면 아버지인 나나 오빠인 나는 잠도 잘 수 없고 먹는 것도 사는 것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하늘 향해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피로 연결된 사랑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분의 가슴속에는 아프리카의 부족간 다툼으로 처참하게 죽어간 이름 모를 소년과 소녀들의 비극이든지 어제 서울에서 보험금을 타려고 남편의 손에 죽임당한 얼굴도 모르는 불쌍한 아내의 죽음이든지 그것이 모두 내 가족과 내 딸과 내 동생의 죽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매일 순간마다 절규가 되었고 원통한 비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가슴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히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러한 가슴은 역사상 어느 누구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가슴이라는 것만은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진실이었다.
그분의 일기나 기도문의 극히 일부분만 군데군데 살짝 엿보더라도 그분의 이러한 심장이 터지는 비명과 신음을 들어 볼 수 있다.

“진짜 하나님은 어디 가셨기에 이토록 자식들이 다 죽어도 냉담하게 구원의 손길 하나 뻗쳐 주지 않는단 말인가. 도대체 하늘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 처참한 악마들의 살인 현장을 보고도 무관심하게 내버려둔다는 것은 바로 하늘이 악마들의 살인죄에 침묵으로 동참하는 처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오 하나님이여! 오 하늘이여! 하늘은 침묵으로 악마들의 살인죄에 동참하지 마소서. 50억 친자녀들의 생명을 구원하시옵소서. 만일 하늘이 침묵과 무관심으로 50억 내 형제들 다 죽이는 살인극에 동참자가 된다면 소자는 영원히 아버지 곁에 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 땅에서 내 형제들과 기꺼이 죽을 것이옵니다. 소자는 내 형제들의 억울한 생명들을 팔아 아버지 곁에 가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 아버지여! 소자를 심판의 사자로 내보내 주시든지 아니면 하루가 천년같이 고통받고 있는 소자의 생명을 취하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 내려 주옵소서. 내 형제들의 죽는 현장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사오니 속히 오늘 지금 결정 내려 주옵소서. 소자를 이대로 천국에 데려 가신다면 소자는 낙원의 어느 나뭇가지에 목을 매어 죽을 것이옵니다.

내 형제들 다 죽이고 어찌 혼자서 욕된 영생을 누릴 수가 있겠나이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이옵니다. 내 형제들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기를 원하나이다.“

“소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겠사오니, 이제는 제발 저를 미쳐서 아무 것도 모르게 하시든지 술에 취해 정신을 잃게 하시든지 아니면 제 생명을 거두시든지 아니면 지금 출발시켜 주시든지 이 밤에 결정 내려 주옵소서. 이 시간에 지금 결정 내려 주옵소서”

하늘을 향해서는 날마다 이러한 간구가 전부였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이 하늘 부모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천인상봉으로 화목시켜 주는 것이 일생 동안 삶의 전부가 되었다. 하나님은 영생과 천국을 담보로 해서 예배와 돈과 영광과 헌신을 요구하는 그런 독선적이고 이기적 독재자가 결코 아니며, 육신의 부모보다도 더 자상하고 인정이 넘치는 친아버지임을 알려주고 그 분과 친부자지간으로 결합되어 죄 안 짓고 친형제 인류들과 서로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기만 해준다면 더 이상 아무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 하늘 부모님의 마음임을 말로 삶으로 전달해 주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과 딸들인 인류가 존귀한 신분도 가슴도 다 잃어버리고 짐승보다도 더 추악하고 무서운 동물로 변해버린 처참한 현실과 서로를 해하고 죽이는 날마다 이어지는 인류의 불행과 고통을 눈뜨고 차마 볼 수 없어 당신 스스로 ‘통곡의 신’이라는 되어버렸다고 하면서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수많은 애통가와 한가를 지어서 울며 부르고 다니는 삶의 연속이었다.

“부르다 부르다 죽을 친아빠의 이름이여
애통하다 애통하다 죽을 친아들의 이름이여
동정도 감정도 없는 목석 같은 묵묵부답의 아버지와
망국의 한을 품고 부르다 부르다
병이 들어 사라지는 아들이여
하늘과 땅은 이다지도 맞지 않았던가
장구한 세월 동안 그리고 앞날의 세월은 어찌할 것인가
무수한 세인들은 악귀들이 다 죽이고
극소수의 의인들은 천부의 무정, 매정으로 다 죽었다네
아 불행한 우주 가정이여
아 망하는 우주 가정이여
無 無 無, 온 우주는 죽음의 빈 공간만 있으리라
그때에 하나님은 홀로 남아서 생각하시리라
사라진 무수한 자녀들이 왜 다 죽어 없어지게 되었는지를“

“목이 메인 애통가를 불러야 옳으냐
피눈물을 삼키면서 꾹 참아야 옳으냐
恨이 맺힌 황태자라
한숨 세월 일생의 세월
온 인류가 불쌍해서
오늘도 아빠 부르네“

바울의 사랑의 노래도 있고,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도 있고, 모세의 중재기도도 있고,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고뇌의 기도도 있지만 나는 역사의 페이지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자신의 해탈이나 죄로부터의 해방, 자신의 구원이나 생명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슬픔과 인류의 고통에 대한 이러한 절규의 기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분에게는 일생의 시와 기도문과 한의 노래는 이러한 가슴과 사상으로만 적나라하게 도배되어 있다.
청년의 때에 내가 한창 존경하고 심취했던 공자나 노자, 성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 슈바이처, 선다싱, 찰스 피니, 스펄젼, 디엘 무디 이런 사람들 또한, 우리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가슴을 소유한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과 가슴에까지 파고들어가 확인한 결과로는 이분의 가슴속에 담긴 애정과 한과 절규와 분노와는 종류와 그 농도가 전혀 달랐다. 또한 근래 자기만 믿고 순종하고 충성하면 몽땅 천국에 데려가 준다는 자칭 예수라 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을 깊이 파고 들여다보면 그 악취 앞에는 너무도 상거가 멀어서 뒤로 자빠질 판이었다.

개인이 가진 능력이나 자질이 그 사람의 본질적 정체성은 아니다. 그 사람의 말도 행동도 글도 생활도 웃음도 눈물도 심지어는 생명의 단절까지도 얼마든지 의도적 가식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숨을 열 번 백 번 잃을지라도 전혀 아까움이 없이 바라는 것, 가슴을 온통 다 채워버린 소원과 갈망과 간구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중심에 담긴 진정한 정체성일 것이다.

마치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고 싶은 갈망으로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 된 엄마의 가슴처럼, 그때 우리는 그 여인이 진짜 엄마의 정체인 것을 알 수가 있게 되는 것과도 같겠다.

양 극단의 놀람

그런데 놀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충격은, 그런데 이런 분이 어떻게 창기십자가 라는 이름으로 여인을 취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앞뒤 볼 것도 없이 흉악한 위선자라고 욕하거나 아니면, 하늘 가장 높은 거룩한 경지에서 땅의 가장 밑바닥 시궁창까지 추락해 버린 타락의 실증이라고 비난을 받기에도 충분한 사건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놀람과 분노도 당연한 것이었다. 당신 또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분노가 없다면 그것이 비정상이며 비극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죄악에 대한 분노가 있다는 것은 그나마도 사람들의 감각 속에 의의 영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이기에 그분에게는 반가움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나타내는 죄악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죄악을 증오심으로 떨쳐버리고 운명적인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만 해 준다면, 그 분은 죄악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에 의해서 당신 자신이 돌에 맞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감사하면서 기꺼이 죽어갈 분이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 가슴속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전혀 은밀하게 이뤄진 일들이 갑작스럽게 드러난 사건도 아니었다. 역사상 숱한 인생들이 아무 것도 아닌 피부가죽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과 딸들이라는 신분도 팔아먹고 한낮 짐승처럼 죽어간 백골들을 돌아보면서 통탄 통탄했던 분이 바로 그 분이었기 때문이다.

긴 세월의 호소와 간구에도 사람들이 끝끝내 죄악의 고리로부터 완전한 분리를 극복해 낼 수 없다면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죄악의 입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서 처참하게 죽어 사라지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은 평소 누차 선포한 사실이었다.

죄악을 끝장내는 것이 일생의 한이 되고 목적이 되었던 분이 죄에 대한 분노의 열정과는 너무나 상반된 전혀 역설적인 행동 앞에 누구든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동안이 위선으로 철저하게 포장된 이중성, 아니면 절대적인 극에서 극으로 추락한 타락, 이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사람들은 쉽게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전혀 파격적인 이 역설적 극단 행동 사이에서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세 가지 정도의 가능성을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본래 절대 악이었는데 절대 선으로 완벽하게 포장해온 일생이었을 수도 있다. 진실은 불변의 절대 선인데 어느 때부터 절대 악의 모양을 취했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지극히 높은 절대 선의 경지에서 생애하다가 지극히 밑바닥 절대 악의 상태로 완전 타락해버린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양극단의 둘 중에 하나는 진실이고 하나는 거짓이라면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 행동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어느 단체에도 소속감이 없는 지극히 객관적인 입장과 시각에서 냉정하게 해부해 보고자 했다. 외적인 선한 행동과 선한 사업은 얼마든지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의 일생과 가슴에 담긴 사상과 원통과 절규를 냉정히 탐색해보면 그것은 결코 누가 흉내낼 수 있는 사랑이 아니며, 포장으로 꾸며낼 수 있는 죄에 대한 분노, 의에 대한 갈망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지켜본 사람은 누구나 양심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그 분이 나타낸 일련의 절대 악처럼 보이는 행동은 오히려 흉내낼 수 있는 역설적인 행동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도무지 식을 수도 변할 수도 없는 그분의 가슴속 일관된 사상과 한이 여전하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사무치도록 한이 된 절대 선에 대한 갈망과, 죄악에 대한 분노와 고통으로 이어진 가슴의 원통과, 의에 대한 열망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일생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식어지기는커녕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은 가슴속 사상과 정신이 절대 선의 경지로부터 추락이란 절대 없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가장 가능성 있는 경우의 수는 절대 악의 모습을 일시적으로 취한 절대선의 일관된 가슴으로 나타낸 지극히 파격적인 역설적 행동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가장 유력한 가능성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무는 열매로 안다. 본질적으로 절대 악이라는 나무였다면 그 열매인 백성들의 생애는 완전 엉망진창으로 타락한 악의 열매로 가득 찼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절대선이라는 나무였다면 그 열매로 백성들의 생애는 죄와는 분리된 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운 선의 열매를 맺힐 것이다.

나무는 적당히 포장될 수 있어도 열매는 속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개 종교지도자들이나 소위 교주라는 사람들의 자녀들은 부모의 이중성에 고통하고, 그 이중성 사이에서 부모의 가슴속 본질적 실체에 직면하게 될 때에 갈등하며, 죄의 욕망은 저항할 힘을 얻지 못하고 죄의 밥이 되어 타락해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열매가 나무를 증거하는 것이다. 속일 수가 없는 본질적인 속성의 들통이다.

그러나 사모님과 세 자녀들에게 선생님은 마음으로부터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남편이며 아버지가 되고 있다. 아버지의 이중성에 갈등하거나 타락한 자녀는 하나도 없다. 장성한 어른들이 되었지만 아버지를 마음으로 존경하며 순종하고 사랑하고 있다.

일생 동안 일관된 아버지의 가슴속 동기와 사상과 인류애와 진실을 보고 겪었기 때문이다. 천성이신지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모님 같은 분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흔치 않는 분이라는 것은 늘 느끼는 감동이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결코 지나치는 법이 없는 동정심, 항상 먼저 허리를 숙이는 겸손, 이기심이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이런 마음이 어디로부터 말미암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또한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비록 돌나라를 탈퇴하고 다른 삶의 길을 가고는 있지만 이상의 사실들은 최대한 냉철한 이성을 견지하면서 나의 치우침이 없는 양심이 부정할 수 없는 진정한 고백임에는 틀림이 없다.

날마다 경악케 하는 사건들로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는 험악한 세상에서, 아내만 집에 남겨두고 여러 날을 출장을 가든 오랜 날 집을 비워두고 문 잠그지 않고 어디를 다녀와도 아무 걱정이 없는 동네는 내가 한동안 살았던 그 동네 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법 없이도 살 참 착한 사람들의 세상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기송<전 돌나라한농복구회 회장,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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