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재에 애틋한 사랑의 전설이 깃든 박달과 금봉이를 재현한 동상>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작가 미상>

청풍명월,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가로지른 해발 504m의 박달재.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朴達)은 과거를 보기위해 한양으로 가던중 목가적인 지금의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박달의 조형물>

때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촌가에 찾아들어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을 정도였다.
금봉은 금봉이대로 선비 박달의 초초함에 그만 마음을 들켰다.

그날 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게 된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선녀가 따로 없었으리라.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번이고 의심했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졌다.
날이 밝으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며칠 더 묵게 된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언약한다.

그러나,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사진>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싸리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로 떠난 박달은 자나깨나 금봉이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詩만을 읊었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박달은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금봉은 박달을 떠내 보내고는 날마다 서낭에서 빌었다. 박달의 장원급제를 위해...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서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급기야,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에서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슬픔을 품은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후에 낙방거사 박달은 주눅이 들어 평동으로 되돌아왔다.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한 박달은 땅을 치며 뉘늦게 목놓아 울었다.

<박달재 노래비>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환상에 빠진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이를 따라 이름을 부르며 뒤를 좇았다.

고갯마루에서 가까스로 금봉이를 붙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품에 끌어안은 박달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숨졌다.

비련의 일이 있은 뒤부터 평동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됐다는 구전이 옷깃을 여밀게 한다.
<권병창 기자/사진=박영순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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