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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이름 하사받은 말이 잠든 ‘의마총’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이유길장군의 충성스런 말
<이유길 장군의 묘역>

16세기 이래 전무후무한 왕이 직접 말에게 이름을 하사한 말 비석이 재현돼 사학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화제의 명소는 다름아닌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에 위치한 '의마총(義馬塚)'이다.

이 비석은 자신이 모시던 장군이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을 예측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자 3일간을 달려 장군의 집에 도달해서는 장군의 죽음을 알리고 죽음을 맞이한 충성스러운 말을 기린다.

이 충성스러운 말의 주인인 이유길장군은 약관 18세에 군인이 됐다.

본관은 연안, 이선경의 아들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따라 출정해 1597년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9품직을 제수받았다.

과거 만주족의 한 부족인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5개의 부족이었던 여진족을 통일하고 대륙으로의 확장을 꾀하며 명나라를 공격한다.

이 시기 광해군은 이미 쇠퇴의 길로 들어선 명과 대세로 떠오른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시행했는데, 당시 명은 임진왜란 때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지원군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명에 구원군을 보내며 강홍림 원수에게 ‘섣불리 군을 움직이지 말고 이기는 쪽에 가담하라’는 밀지를 내렸는데, 대명의(大明義 )에 충실한 선봉군과 밀지에 얽매인 본군이 갈리는 비극이 발생했다.

<우리 한국사에 처음으로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은 말의 '의마총'>

이때 이유길 장군은 도원수 강홍립의 부장으로 함께 명에 파병됐다.

1만3천명의 우리 군이 파견됐지만, 조선 원군은 1619년 심하의 후차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모두 전사했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이유길 장군도 마지막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는데, 죽기 직전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글 5자 ‘3월4일사(三月四日死)’를 써서 말에게 매주고선 채찍질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산과 강을 건너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와 장군의 전사를 알리곤 슬피 울다 쓰러져 죽었다는 구전이다.

이후 광해군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1621년 이유길 장군에게 병조참판직을 내렸고, 말의 무덤을 '의마총'이라 부르게 했다.

이유길 장군의 무덤과 의마총은 광탄면 발랑리 183번지에 위치하는데 말은 돌아와 땅에 묻혔으나 이유길 장군의 시신은 찾을 수 없어 가묘로 조성돼 있다.

사당 옆에는 연안 이씨의 종손 이봉길씨가 살고 있어 설명과 함께 묘역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넓은 공터 옆에 신도비가 있고, 왼편으론 이유길 장군의 불천위(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땅에 묻어야하나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영구히 사당에 보관하도록 왕이 허락한 신위)가 모셔진 부조묘(불천위를 모신 사당), 청련사가 있다.

이유길 장군의 활약과 교지 등이 담긴 ‘연안이씨 이유길 가전고문서’는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됐으며, 후손 이호룡家에 소장돼 있다.
<권병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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