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거짓수법 동원

조정래작가 '아리랑문학관' 김제에 조성
일본이 군용 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만주를 침략한 직후인 1931년으로 기록된다.

그때는 유곽에서 몸을 팔던 여자들을 모아 데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매춘부가 아닌 일반 처녀들 100여 명으로 일본군이 육군위안소를 직영으로 개설한 것은 중-일전쟁이 터진 다음해인 1938년이었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낭인 패거리들과 조선의 친일파 매춘업자들을 동원해 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며, 모집에 나선다.

간호부는 사람 대접받고 돈도 많이 벌고 의사하고 결혼도 할 수 있다고 꼬드겼다. 

거짓말을 꾸며대며 사기극을 벌인 이들은 한국의 젊은 여성들을 군용위안부로 끌어갔다.

그러다가 1941년 7월,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은 직접 나서 1만여 명의 처녀들을 종군위안부로 끌어가려고 전국적으로 '여자사냥'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경찰과 형사들이 처녀들 납치에 앞장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낭인들과 매춘업자들의 각종 사기극과 경찰이 자행하는 납치극이 동시에 이뤄지는 속에서 일본 육성군과 해성군은 진주만 기습직후인 1941년 12월 말에 태평양전쟁의 전선 전역을 걸쳐 지위개설을 명령했다.

<일본 군경들이 독립운동가 등을 붙잡아 농기구인 작두로 목을 자르는 형상을 만들어 놓은 청동상>

그리고, 일본군은 조선여자들의 인원 수를 물품대장에 올려놓고 각 부대에 아예 물품으로 배급했다.


이때부터 총독부에서는 근로정신대로 위장된 종군위안부들을 손쉽게 끌어가기 위해 친일파 자식, 문인들을 동원했다.

그들은 순회강연을 하고 잡지에 글을 쓰고 해 총독부가 원하는 만큼 종군위안부나 근로정신대로 끌어가는 데 큰 몫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소설 주인공들에 삶의 터전이던 김제시 죽산면 내리 외촌마을에는 '아리랑문학관'이 조성됐다.

독립운동 등 조선 후기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삶을 소설화한 '아리랑'을 총체적으로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는 산교육의 장으로 연중 각광받고 있다. 
<아리랑문학관(김제)=권병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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