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터넷언론인연대 제공>

[밀양=한문협 기자]항일 독립투쟁가 김원봉장군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김학봉 여사가 24일 오전 3시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유족으로는 슬하에 차남 태영 삼남 봉영씨를 두고 있다.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이끌며 일제 강점기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약산 김원봉은 1948년 남북연석회의 당시 북으로 간후 그대로 머물렀다. 

이후 그는 1958년 11월, 연안파 숙청작업 때 숙청당한 것으로 기록된다.
이같은 연유로 인해 남쪽에 남겨진 약산의 가족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온갖 시련이 찾아들었다.

<살아생전 당시 김원봉 장군/사진=국민TV 발췌>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난 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약산의 형제 4명, 사촌 5명이 그만 총살을 당했다.

김 여사의 부친은 연금 상태에서 돌아가셨다.

남편은 우익들에 의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김 여사도 약산의 월북으로 인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모진 심문을 받았다.

약산의 형제 중 생존자였던 김봉철씨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된 형제와 사촌들의 시신을 수습하였다는 이유로 5.16 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선고문에는 박정희가 직접 서명을 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연좌제의 족쇄가 씌워지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 여사의 아들들은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이런 가운데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에 연좌제 금지를 명문화 하면서 차남 태영씨는 군 제대 후 유학 비자를 받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 후 의류업에 종사를 하는 가운데 공부를 하면서 경영학 박사를 획득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의열단 약산 김원봉 장학회' 회장 및 '임시정부 건립위원회'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학봉 여사의 빈소는 경남 밀양시 부북면 춘화로 60 밀양 희윤요양병원에 차려졌다. 장지 등의 자세한 장례절차는 김태영 박사가 귀국한 후 결정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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