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더위속 장기판에서 눈을 떼지 못한채 진검승부를 겨루는 두 어르신의 소리없는 다툼이 사뭇 진지하다.>
<선공을 전개하는 80대 어르신의 왼쪽 공격이 긴장감을 이끌어 낸다. 여기에 70대 어르신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남산(서울)=권병창 기자] 작자미상의 예성강곡은 잡기에 능한 한 어부가 자신의 처를 두고, 바둑(장기)판으로 일대 혈전을 벌이는 대목이 구전된다.

예나 지금이나 호기어린 남정네들의 내기 판이며, 놀음판 가운데 하나가 장기와 바둑 등 여성들의 눈총을 받기 일쑤로 곧잘 등장한다.

이같은 분위기는 36를 웃도는 가마솥더위속 서울의 랜드마크, 남산 안중근의사 동상 맞은편에는 수령이 무려 100년에 이른 느티나무 노거수가 즐비하다.

그 가운데는 그늘이 들어서며, 선선한 바람결이 찾아드는 명소로 어김없이 어르신들의 장기판 명당으로 여름이면 잦은 발길로 이어진다.

24일 오후 이같은 실정에 현장에는 70대 어르신과 80대쯤 가늠되는 두 어르신 사이 자존심이 걸린 장기두기로 일대 각축전을 벌였다.

다소 자존심이 강해보이는 70대 어르신은 한눈에도 호탕하고 공격적이며,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품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더욱이 필자가 지켜본 20여분 동안 두드러진 실력차에 형님또래 80대 어르신에게는 여지없이 패색이 짙은 가운데 말로 두는 장기판은 사뭇 명장이 따로 없다.

심지어 당신의 궁(왕)이 있는 주변에는 차와 졸이 고작으로 함락직전이건만, 손에 쥔 장기 알조차 쉽사리 포기를 못했다.

<70대 어르신은 연신 수세에 몰리다가 막바지 궁하나만 손에 쥔채 요리저리 자리만 옮기며 항복(?)을 하지 않고 있다.>
<급기야 우측의 70대 어르신과 가까운 지인인듯 훈수꾼 어르신이 가세했지만 결과는 역시 2연패를 기록, 씁쓸함을 더했다.>

그는 "같이 맞상대로 공격해 잡아도 나중에는 내것만 줄어 든다"며 볼맨소리를 내뱉는다.

장기판의 느린 손놀림과 잦은 놀림투를 불만투성으로 여긴 그는 공격수로 상과 졸, 마 등 다소 보잘것 없는 군졸만 앞세워 나가지만, 공격수는 금세 전멸되기 십상이다.

공격과 방어, 전략 수는 필자가 곁에서 바라보아도 턱없이 낮은 수로 보인데다 불볕더위로 인한 불쾌지수마저 우려되는 분위기다.

허망하게 패배를 맞은 젊은(?) 70대 어르신은 마침내 항복을 인정한 뒤 곧바로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급기야 지근거리에서 더위를 피하던 동년배의 어르신 훈수꾼이 용병(?)으로 가세하며, 전세는 역전되는듯 했다.

이 또한 10여분을 지키지 못한채 멋진 진검승부를 기대했지만, 여지없이 무너지고 또다시 씁쓸한 아우 70대는 애먼 장기판만 탓했다.

자고로 "선무당이 자기 장구만 탓한다"드만, 이날 장기 한판은 역시 한편의 실황극으로 연출된 가운데 불볕더위속 삶의 지혜를 얻는 값진 기회로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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