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사 각오하고 국내외로 떠난 길위서 새 삶 구가

<시인 문미란 씨 카페 갈무리>

병마·악성 채무, 학자로 평생 일군 모든 것 잃어
100여 권의 저서는 물론 300여 권의 역서 남겨 

[권병창 기자] “정년 퇴임을 앞두고 빚으로 전 재산을 잃은데다 5년 생존이 어렵다는 췌장암까지 걸려 몸도 마음도 둘 곳 없어 차라리 ‘객사하자’는 심정으로 무조건 여행을 떠났습니다.”

22일 여명이 동틀 무렵, 타계한 고 전규태(90)교수의 살아생전 후일담이 안타까운 비애로 남아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다.

‘사학명문’ 연세대 국문과를 나온 전 교수는 한양대 강사, 연세대 교수·문과대학장, 미국 하버드대 옌칭 교수, 노산문학상 심사위원, 호주국립대 객원교수, 전주대 인문대학장,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부회장 등을 맡아 학자와 문인으로 화려한 삶의 이력을 누렸다.

100여 권의 저서는 물론 300여 권의 역서까지 남길 정도로 집필에도 남다른 열정을 불지폈다.

고인의 애제자 채인숙시인은 "월탄 박목월과 함께 활동해오면서 연세대에서는 최인호 등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며 "하버드대와 국립 호주대학의 객원교수로 13차례나 해외 여행길에 오르면서 한국 문화를 알리는데 앞장섰다."고 상기했다.

<고 전규태(사진 왼쪽)박사가 생전에 한국SGI 문학부원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던 모습/사진=시인 채인숙씨 제공>

그는 한때 질곡속에 핀 방초인양, 고인이 65세가 되던 1998년부터 2010년까지 12년은 문우와의 안부조차 나누지 못했다.

다름아닌 난치 췌장암으로 사망선고를 받으며 그의 앞날에는 예기치 못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16년 전 가족 중 한 사람의 실수로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됐지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길거리로 쫓겨났어요. 급기야 췌장암 판정까지 받아 췌장의 3분의 2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명예와 부, 가정, 건강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전 교수는 이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로 심지어 간혹 노숙자로 전락했다는 후문마저 나돌았다.

“1998년 7월, 정년 퇴임식도 못하고 서울 삼성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어요. 주치의가 딸에게만 길어야 석 달 살게 될 거라고 하고, 제게는 ‘최후통첩’을 하지 않았지요. 단지 출가(出家)하는 심정으로 살라고 권고했어요.”

전 박사는 충격속에 일단 속세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석주스님을 예방한 후 스님의 도움으로 국내 산사를 두루 답사한다.

이후 아예 공무원 연금을 일시불로 받아 마음둘 곳을 잃고 세계여행을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객원 교수로 있던 호주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세계를 몇 차례나 도는 긴 여정을 택했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마존 등 오지를 많이 누볐다는 전언이다. 글쓰기는 중단했지만, 평소 해보고 싶었던 그림을 그리며 늦깍이 화필을 손에 쥐게 됐다.

고양시 독신자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거주하던 고인은 노인연금과 한국전 참전용사 수당 등 월 40여 만원에 이른 수익이 고작이었다.

단테는 짝사랑했던 여인이 시집가서 아기를 낳다 죽자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던 죄책감에 ‘신곡’을 썼다는 그의 전언도 새롭다.

한 문학지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아우른 시인 전규태교수에게 ‘한국의 대문호(大文豪)’라는 칭호를 헌사한 바 있다.

최근에는 한국SGI 문학부의 ‘그루터기’를 창간, 교감을 나누며, 막바지 문학의 혼을 불지핀 귀감에 큰 호평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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