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기 조 (시인,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6ㆍ25가 60주년이 되는 해다. 6ㆍ25를 사변이라고도 했다. 그 다음에는 전쟁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다 남침이라고도 말했다.

사변이나 전쟁이나 남침이나 총칼을 앞세워 싸워서 죽이고 강토를 초토화한 것은 똑같다.

숱한 이산가족과 전사자들, 그리고 제명대로 살지 못한 죽음을 당한 사람은 숫자로 밝힐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오순도순 잘 살던 집안이나 마을이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고 한데로 밀려나는 것을 숱하게 보아온 나는 6ㆍ25의 참상을 그대로 그려낼 수 없다.

너무도 참혹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아침을 먹고 약속대로 정구를 하기 위하여 학교로 갔다.

정구부를 맡고 계신 황선생님, 그리고 그 날 함께 정구를 하기로 약속한 멤버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20 명이 넘는 사람들이 롤러로 코트를 밀고 있을 때, 학교 방송실에서는 음악을 내보내고 있었다.

운동장 뿐 아니라 학교 교문 앞에 있는 버스차부에 몰려 있는 사람들까지 어깨가 들썩이게 만드는 행진곡을 틀어 주고 있었다.

한 30 분 지났을까? 느닷없이 북한군이 삼팔선을 넘어 남한으로 진격해 온다는 말이 다급하게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타고 들려왔다.

신문이나 라디오가 집집마다 보급이 안되었을 때, 학교 방송실의 중계는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소식통이었다.

계속 반복해서 휴가 나온 국군장병들은 모두 부대로 돌아가라는 말에 그 뜻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던 시절, 북한군이 왜 남쪽으로 쳐들어 왔는가도 따져보지 않던 시절에 우리는 전쟁을 만났다.

7월 1일, 내가 살던 예산읍에 까지 인민군이 들어온다는 말과 함께 일제히 소개령이 내렸다.

경찰서에서는 후퇴준비를 했고 군청이나 읍사무소 직원들도 피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피난가기로 결정한 아버지를 따라 식구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시루뫼 고개를 넘어 청양을 거쳐 부여로, 부여에서 서천을 거쳐 금강을 건넌 뒤 군산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온 식구가 길을 나섰으나 청양에 못 미쳐 아버지와 우리 형제, 남자들 셋만 남쪽으로 내려가고 나머지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정한 뒤 우리 가족은 헤어졌다.

그리고 10월 28일 국군이 수복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 올 때까지 숱한 고생을 했다.

인민재판을 하는 광경도 보았고 죽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광경도 보았다.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벼 모가지에 붙어있는 낱알을 세는 모습도 보았고 청년들이 징용으로 끌려가는 모습도 보았다. 공산당을 반대했다고 집에 불을 놓고 재산을 몰수하는 현장도 보았다.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면 마음이나 편할 것이지만 이런 일들을 일일이 보고 난 그때의 심정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가졌다.

UN군과 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남하했던 군인들이 북진할 때, ‘이제는 살았구나’란 생각을 하고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면서도 한편으로 겁이 나기도 했다.

공산당과 인민군이 다시 내려오면 어쩔것인가? 그때의 조마조마한 생각은 말할 수 없다.

역사에서 배웠던 전쟁, 문학에서 읽었던 전쟁의 모습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참혹한 현장을 겪으면서도 목숨만 부지하기 바랐던 그 시절의 내 초라한 모습은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러나 60년 대를 지나 70년 대를 살아오면서 나라 꼴이 잡혀갔고 삶의 희망이 보일 때, 우리들은 굶지 않고 먹는 것만 바랐고 하나라도 배워야 한다는 꿈이 머리와 가슴을 짓눌렀다.

그런 험했던 시기를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가슴을 울리는 전쟁문학도 그리 많지 않다.

수없는 죽음을 보면서도 고매한 인간성을 작품으로 그려 내지 못했다. 겨우 해낸 것은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하는데 급급해서 죽이고, 속이고, 거짓말하고, 빼앗고, 뺐는데만 정신을 쏟았다.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흩어지고 거짓말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북쪽 집단들이 꾸미는 일을 빠짐없이 체험하고도 그들과 손잡자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두둔하는 사람들도 속출한다. 민족이 분열하면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알만한 사람들이 자신의 야욕 때문에 두 눈을 감는다.

어찌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그들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과 손잡자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 6ㆍ25가 북침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들의 노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라꼴은 말이 아니다.

이런 무서운 현실을 속속들이 담아내는 거대한 문학작품이 나와서 민족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학만이 역사를 소상하게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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