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제마 유구 등 백제유물 잇단 출토 천안 위례성 성벽축조 발굴조사 등

천안지역 출향인과 지자체를 비롯한 향토 사학계는 유서 깊은 천안 위례산성의 발굴과 사료가치가 높은 지명 되찾기를 통해 애향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천안시 북면 운용리와 입장면 호당리 사이 자리하고 있는 해발 525.9m의 위례산성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일찍부터 기록 또는 구전된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 초기의 도읍지가 한강유역이라고 믿고 있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일찍부터 천안지역의 향토 사학자를 중심으로 역사학계의 관심이 집중돼 왔다.

위례산성이 천안지역에 있는 산정 중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고고학적인 조사가 됐을 가능성은 확인했지만, 초기 도읍지로 볼만한 근거는 미흡하다는 견해이다.

사실 ‘삼국유사’에서는 직산지역에 백제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이 위치한다고 했지만, 이보다 먼저 편찬된 ‘삼국사기’에서는 위례성을 이름만 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유명미상지분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미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에는 위례성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삼국사기보다는 늦지만 삼국유사보다 이른 시기에 편찬된 해동고승전(1215)의 석마라난타조에는 백제가 처음 개국한 한산을 광주로 보고 있다.

천안 위례산성과 백제 초기 도읍지 위례성과의 관계는 자연히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전초기지로 탈바꿈 됐다.

천안시 북면 주민들로 구성된 ‘위례문화제전위원회’가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와 위례산성 주변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문헌기록이 전하는 백제 위례성의 실체에 다가가고자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바 한때 설득력을 얻었다.

앞서 진행된 고고학적인 조사 내용을 중심으로 천안 위례산성의 조사 성과와 향후 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례산성은 해발 525.9m의 위례산 정상부를 남쪽 끝으로 하여 그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는 해발 300-520m 사이의 능선을 따라 축조한 산성이다.

천안 위례성은 1995년 서울대 박물관의 시굴조사와 1996년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에서 통일신라 때 축조한 것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대량 수습한 백제 토기조각이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해 건국한 한성백제(기원전 18~475년) 시기의 것으로 밝혀졌다.

현지 자연지형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축성된 관계로 산성의 평면 형태는 불규칙한 형태로 나타났다.

한반도를 축으로 볼때 남북으로 약간 긴 마름모꼴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벽 전체의 길이는 950여 m로 작지 않은 규모를 하고 있다.

규모는 큰 편이지만 내부 면적은 협소한 편으로 기록된다. 즉, 남북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축성된 관계로 남단 정상부에서 북단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능선을 이루고 있다.

부분적으로 평지를 이루고 있는 정도이다.

산성이 자리한 위례산은 충남 지역을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차령산맥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해발 579m의 성거산과는 직선 거리로 2.5km 정도 떨어져 있다.

따라서 산성에서 보면 차령산맥 서쪽의 천안, 직산, 입장, 안성 등 충남 서북부와 경기 남부의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오며, 안성천과 아산만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남쪽으로는 흑성산성과 목천토성, 그리고 충북 진천지역과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경기도와 충남-북의 경계지점에 해당돼 세 지역을 동시에 감시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에 해당되는 셈이다.

위례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이뤄진 것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초창기는 7일간에 걸친 간단한 시굴조사를 통해 토석혼축성임을 확인했다. 축조시기가 백제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음이 가시화 됐다.

뒤이어 1995년 5월에서 7월에 걸쳐 다시한번 시굴조사가 이뤄졌고, 이를 바탕으로 1996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는 기초적인 발굴조사가 추진됐다.

이를 통해 성벽의 축성법과 함께 산성의 정상부에서 제사를 지내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와 토제마 철제마 등 관련 유물이 출토됐다.

유물은 지표상에서 수습된 것도 있고 토성벽 안에서 발견된 것도 있었다.

성벽의 기저부에서 출토된 것으로 볼때 위례산성의 축조 상한은 4세기에서 5세기 전반경에 이른다는 사학계의 통설이다.

이와 달리 성벽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통일신라시대의 것들로 전해진다.

천안시와 단국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팀은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경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잠정 추론한다.

그 외 성벽 안에는 백제토기편과 고려시대 자기편에 이어 조선시대 백자편이 출토돼 다각적인 시대로 축조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향후 과제 위례산성은 백제 초기의 도읍지와 관련하여 꾸준히 주목받아 왔다.

사실 백제 초기 도읍지와 위례성이 밀접한 관련 사실은 기록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게 다수설이다.

학자들은 그간의 정황을 추론할 때 백제의 초기 도읍지가 위례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동안 위례성 관련 기록은 물론이고 천안 위례산성과 관련된 기록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도 이뤄진 바 있다.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직산지역이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다는 사실에 의심을 갖는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후문이다.

오히려 당대 지식인을 대표하는 서거정은 직산에 있던 제원루의 ‘제원’을 ‘백제의 근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만큼 위례산성이 자리한 직산지역을 백제 초기 도읍지 위례성이 자리한 곳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삼국사기’등 백제 위례성 관련기록과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산지역을 백제 초기 도읍지로 인식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고고학적으로는 해결할 과제가 산적해 있는 데다 우선 위례산성 자체가 백제 초기에 축성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위례산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졌던 인근의 적석시설 역시 적석총이 아니라, ‘적석시설’임이 확인됐다.

지금의 서울 송파구 관내 풍납동토성이나 몽촌토성, 공산성, 부소산성 등과 같은 백제의 왕성 후보지들과 입지조건이 다른 것도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는 산성의 축성 시기를 앞당길만한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화급하다.

고고학적으로 백제 초기로 인정한 만한 유물과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것도 부담이다.

지금까지 위례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4세기 이상을 소급할 수 있는 유물이 전무한 것으로 전해진다.

4세기 이후에나 축조한 산성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다.

국내성 청암리토성 풍납동토성 몽촌토성 공산성 부소산성 경주 월성 등 삼국시대 왕성이 갖는 일반적인 입지조건과 맞지 않는 높고 험준한 위례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설득력을 잃고 있다.

뜻있는 학자들은 앞으로 ‘직산-위례성’이란 설명이 어떻게 해서 ‘삼국유사’에 남게 되었으며, 이것이 또한 조선시대에 폭넓게 받아들여졌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견해로 치부한다든지 반대로 기록해 있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만으로는 정설로 얻기 어려울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위례산성이 백제 초기에 축조된 산성임을 입증할 만한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분적인 조사보다는 전면조사를 통해 위례산성의 구조와 축조방법을 살펴볼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탐사보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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