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신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크메르 제국의 영광이여! 다시 한번’/‘지옥의 왕’ 야마신의 32곳 암시 섬뜩

캄보디아의 최대 성지이며,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앙코르와트 신전에는 ‘유해교반’이라 일컫는 우유바다 휘젓기’가 섬세하게 부조돼 있다.

찬란했던 앙코르 왕조의 모든 유적 군에서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와 같은 인도설화, 힌두교의 신화 또한 엿볼 수 있어 그 옛날의 영화를 짐작케 한다.

캄보디아를 떠올리면 ‘킬링필드’의 비극과 가난이 병치 되고, 크메르 제국의 영광을 간직한 앙코르와트 유적을 상기한다.

이곳은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인 듯 아름다운 신전이 유난히 많다.

숱한 유적은 오랜 세월 전쟁의 야욕과 세월의 망각에 방치되며 슬픈 폐허로 떠돌았다. 

비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캄보디아의 상징, 앙코르와트를 찾았다.<편집자 주>

국명은 ‘Kingdom of Cambodia’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에 있는 캄보디아는 라오스, 타일랜드, 베트남과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

국토의 75% 이상이 울창하고 광활한 산림으로 뒤덮여 있다.

802년 자야바르만 2세(802~834)가 세운 ‘캄부자’ 왕국에서 비롯됐다.

한동안 미얀마, 라오스, 타일랜드를 위시한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다스렸던 힘센 왕국이었으나 자야바르만 7세 때의 무분별한 사원건립과 집권층의 부패로 말미암아 쇠락하기 시작했다.

1431년 타일랜드가 침공했고 모든 학문이 분서갱유를 당하고 역사는 말살됐다.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로 밀림 속에 은둔하던 앙코르와트 왕조의 자취는 1860년 프랑스의 식물학자이자 탐험가였던 ‘앙리 무어’에 의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불가사의한 앙코르 유적<사진>은 수도 프놈펜과 씨엔립을 모태로 1,000여 개에 이르며 크고 작은 사원의 모습으로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다.

역대 왕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경쟁하듯 사원을 세웠다.

타일랜드 아유타국과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왕조가 몰락하자,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했듯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를 걷게 된다.

1863년부터 프랑스의 식민 산하로 관리되기 시작했고, 2차 대전 때는 일본의 식민지로 점령되는 등 질곡이 많았으나 1953년 마침내 독립을 맞았다.

1975년 폴 포트 정권(1975~’79)이 집권하며 시도한 캄푸치아 프롤레타리아 혁명 탓으로 경제와 사회분야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캄보디아의 경제는 30년 이상 후퇴하며 빈곤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공산정권 ‘크메르루주’가 들어섰고 이어 아시아 최대의 학살사건인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국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무려 200여만 명이 몰살되는 참극을 빚는다.

폴 포트는 집권 당시 중학교 건물이던 곳을 감옥으로 증축해 ‘S-21’이라 명명하고, 죄없는 지식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고문하고 처형했다.

중국의 문화혁명을 베낀 ‘캄푸치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치를 앞세우고 어설픈 공산주의를 도입하려 했다.

안경을 쓴 자, 숫자를 읽는 자, 글을 아는 자, 손에 굳은 살이 없는 자, 온갖 명분을 내세워 국민을 죽였다.

‘S-21’에는 2만여 명이 수감돼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7명만이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학살에 가담했던 크메르루주군의 평균 연령은 12~16세에 이르는 소년병들로 알려진다.

현지 정부는 개혁과 개방의 기치를 내세우고 외자 유치와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의 도입, 앙코르와트 관광과 주변 인프라를 구축해 착실히 GDP를 증진하고 가난의 대물림을 종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세계적인 관광도시이지만 씨엠립(Siem Reap)은 인구 15만 여명에 불과하다.

‘앙코르 톰’은 앙코르시대 최고 성군으로 추앙받는 자야바르만 7세(1181~1219)가 건설한 국가사원이다.

21년 동안 재위하면서 앙코르 유적의 거의 절반을 건립했다는 기록이다.

주변에 바푸온, 코끼리 테라스, 나왕의 테라스, 피메아나카스 등의 유적이 수백m를 반경으로 모여 있다.

지근거리의 바이욘 사원은 1181년 왕위에 즉위하면서 자야바르만 7세에 조성됐으며, 국교를 불교로 바꾸었다.

바이욘 사원은 대승불교 사원으로 49채의 관세음보살이 사면으로 조각돼 있다.

지그시 내리깐 눈에 긴 귀, 다소 두꺼운 입술. 관세음보살은 큰 귀로 중생의 모든 호소를 귀담아 듣고 위기에 처한 이가 도움을 요청하면 33가지의 화신으로 나타나 도움을 준다고 구전된다.

뱀신의 사원인 피메아나카스(Pimeanakas)는 자야바르만 5세(968~1001)에 의해 건립됐으며, 뱀신 ‘나가’를 섬겼다.

계단은 거의 수직의 각도로 매우 위태롭다. 자칫 실수하면 아래로 굴러 떨어질 정도로 위험 천만하다.

캄보디아 최대의 아름다운 프놈바켕(Phnom Bakeng) 노을은 가히 절경이다.

9세기 후반 야소바르만 1세(889~912)가 지은 프놈바켕 사원은 파괴와 생식의 신인 ‘시바신’에게 헌납됐다는 전설이다.

신들이 거주하는 천상의 산인 ‘메루산’을 본 딴 형태로 지어졌으며, 신에게 경건함을 표시하기 위해 70도 각도의 깎아지른 계단을 기어 올라가야 한다.

사위가 푸르스름하게 물들즈음 붉은 노을이 서서히 내려온다.

물속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번져가며 푸른색과 오렌지색이 섞여들며 천상의 환상을 연출한다.

노을을 보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전세계 여행자들의 입에서 아낌없는 찬탄의 신음이 흘러나온다.

인간은 감정을 공유하며 기쁨을 느끼는 존재이니, 신이 애초부터 혼자서는 살기 어렵게 만들어 놓지 않았나 싶다.

크메르왕조, 앙코르예술의 정수/동서로 1,500m-남북은 1,300m 규모

4차원의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뜻하며,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가 비슈누 신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원이다.

거대한 직사각형의 외형으로 동서로 1,500m 남북으로 1,300m의 넓이에 달한다.

크메르 왕조시대의 가장 걸출했던 장인들이 도성으로 호출을 받고, 왕의 지시 아래 30년 이상을 건축해 이뤄낸 앙코르 예술의 정수이다.

캄보디아의 상징이며, 보물인 가장 위대한 건축물. 신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약 1.5km의 해자를 건너야 한다.

해자는 성을 둘러싼 연못으로 우주의 바다로 상징된다.

사원은 유적 중 유일하게 서쪽을 향해 지어졌다.

고대 크메르인들은 서쪽이 죽음과 저승을 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망자의 무덤’이라는 별명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원 내부 어디에도 사람이 거처할만한 공간은 없다.

앙코르사원을 둘러보다 제3화랑의 지옥도를 만날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저승으로 불려가고, ‘지옥의 왕’ 야마신의 심판아래 죄의 등급에 따라 32개의 각기 다른 지옥으로 추방된다.

불에 타고, 혀가 뽑히고,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여 또 죽는 형벌을 받는 다는 구술이다.

붉은 사암과 라테라이트로 건축이 된 반테이 스레이(Banteay Srei)는 석양의 빛을 받으면 사원 전체가 장밋빛으로 빛난다.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여성적인 미를 간직한 곳으로 ‘여인의 성채’라는 예쁜 별칭을 안고 있다.

섬세한 세공이 정성을 다해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의 마음같이 느껴진다.

이 유적은 전쟁과 내전을 거치며 상당부문 훼손됐으나 다시 만들어 졌다.

또다른 타프롬(Ta Prhom)사원은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툼 레이더’에 등장해 더욱 유명세를 타는 명소이다.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에게 바친 불교사원이었는데, 왕의 사후에 힌두교 사원으로 개축됐다.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과 같은 사원은 불후의 예술작품에 버금간다는 찬사를 낳고 있다.

반얀나무와 카폭나무의 우악스런 뿌리가 사원을 파고들어 으스러뜨릴듯 움켜쥔 형상이다.

나무를 분리하면 사원이 해체될 위험이 있어, 고스란히 보전, 원형대로 살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사원 내부에는 총탄 자국 같은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과거에 내부를 치장하기 위해 루비와 다이아몬드, 진주를 박아 넣었던 자리로 전해진다.

현재는 도둑맞고 유실돼 잔흔만 흉물스레 남아 있다.

나무들이 만든 정글에 사로잡힌 어머니의 사원은 그 구조가 미로와 같다.

미로를 헤매다가 나서면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오기 일쑤이다.

앙코르 유적군의 백미로 인위적인 예술미와 숭고한 자연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독창적인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캄보디아는 1차 산업인 농.어업 외에 제조업과 건설업 등 대부분의 산업이 열악해 석유, 전기, 기계를 비롯 담배, 커피, 의류와 같은 생필품과 의약품도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많은 남자들은 지리한 전쟁으로 전사하거나 공산당 집권시절 처형됐다.

그래서 인구의 과반수가 여자와 아이들이란 통계 수치이다.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이 캄보디아를 찾지만 숙박과 교통, 편의시설 등의 관광 인프라가 아직 태부족하다.

한때 집권당인 캄보디아 국민당(CPP)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벤치마킹해, 1996년부터 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시행했다.

2차, 3차 계획을 거쳐 2009, 2013년 국가전략개발계획의 업데이트 버전을 발표하는 등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는 지금 관광업과 경제성장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이는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머잖아 나아지리라 관망된다.

글로벌 시대의 한 켠을 차지하는 캄보디아를 국제사회가 지켜보는 만큼 우리 또한 그들의 재기를 소망해 본다.

‘크메르제국의 영광이여! 다시 한번’이라고.

<앙코르와트=곽정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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