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창기십자가가 눈에 띈다. 그것의 진실에 대해 갑론을박이 분분하다.
생소한 단어라 내용을 파고들었다.

삼척동자도 익히 아는 예수의 나무십자가는 전 세계적으로 어디서든 곳곳마다 널려 있다. 반면에 모 종교 단체에서 처음 비롯된 창기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십자가다.

창기십자가는 영과 육이 음녀가 돼 버린 인류를 품어 흠 없는 깨끗한 영혼으로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사상을 일컫는다.
만약, 누가 나에게 국적과 인종에 관계없이 음란한 행위를 일삼은 자를 품고 사랑하라면 어떨 것인가? 소름 끼칠 일이다.

그런 자일지라도 값없이 품고 사랑한다는 이 창기십자가가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희생이요, 하늘의 사랑이라는 논리이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 등장한 예수의 나무십자가를 보자! 그 당시는 십자가를 어떻게 논(論)했을까?
예수의 제자들은 그 십자가가 구세주의 희생이요, 그것을 받아들일 때 인류에게 구원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 역시 그것을 부정하고 능멸했다. 수치스런 존재물로 여겼다.
십자가는 극악한 죄인을 매달아 못 박아 죽이던 십자형의 형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흉악한 범죄자로 달려 죽은 그를 그 시대 사람들은 십자가 밑에서 침 뱉고 조롱한 것이리라.
그랬던 사건이 지금은 어떠한가?

시간이 흘러 역사의 한 장이 된 그 십자가는 뭇 세인(世人)들의 구원이요, 예수의 거룩한 희생이요, 고난의 상징으로 인정받고 있다. 뿐이랴!

나무십자가 형틀의 범죄자였던 예수는 매해 12월 25일이면 전 세계인이 동경하고 기리는 구세주의 존재가 됐다.
또한 굳이 크리스천인지의 여부를 따질 것 없이 온 지구촌 축제의 날이 됐다.

이런 예화가 있다.
혼기에 찬 매우 어진 왕자가 있었다.

황후를 맞이하기로 한 그는 고관대작의 여식이 아닌, 평민 가운데서 어진 황훗감을 고르기로 했다. 백성의 노고와 사정을 잘 알 것이라 여겨서였다.

평복 차림의 왕자는 두루 돌아다니다가 모녀가 사는 어느 주막집에 이르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인 만큼 백성의 사정을 잘 알겠다 싶어 왕자는 주막집 딸에게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고 그날 밤 청혼을 했다.

신방을 차려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소곤소곤하던 모녀의 태도가 돌변해 왕자에게 화대를 요구한 것이다. 그것도 왕자라는 신분을 빌미삼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계산한, 아주 비싼 화대를 청했다.

귀한 신분의 왕자가 졸지에 더러운 창기를 취한 꼴이 돼 버렸으니 어이없는 왕자는 심한 모욕과 수치를 견뎌야 했다.

그 어리석은 여인네가 원하는 만 냥을 건네주고 그곳을 떠난 왕자는 다른 어진 여인을 찾아 황후로 맞이한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진노해 군대를 보내 자기 아들을 더러운 자로 만들어 버린 주막집 모녀를 처형시키고야 만다.

바로 창기십자가를 이 예화에 비춰 보면 진의(眞意)를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사실 만물의 영장이요 가장 지혜로운 것이 인간이라지만, 가장 어리석은 것이 또한 인간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판단하는 우(愚)를 범하기 쉬운 존재가 아닌가!

지금 찬반, 갑론을박이 분분한 창기십자가의 진실은 예수의 나무십자가가 그랬듯 언젠가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맹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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