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촉을 불지피기 위해 입장하는 양가의 어머니들
화촉을 불지피기 위해 입장하는 양가의 어머니들

예로부터 자식의 혼례는 아빠와 엄마의 하객이요, 부모의 조상(弔喪)은 자녀의 문상객으로 구전된다.

역시 한 사람의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태어나 일평생에 치르게 되는 큰 행사의 하나)로 젊은 시절 거쳐야 할 중요한 우선 순위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에 보편적인 우리네 삶의 작은 자화상이 될 자식의 결혼은 60세를 기준으로 뒤돌아보는 계기로 여겨진다.

소중한 하객을 맞이하는 동안 반가운 지인은 가족 이상의 기쁨이 솟아나지만 격조했던 축하 손님 또한 피어나는 웃음꽃으로 만발한다.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돈을 맺고 생애 첫 혼례를 치루다보니, 큰 일을 앞둔 며칠은 설렘과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던게 사실이다.

반면, 예식을 알렸으나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하거나 혼례식장에서 만나볼 수 없는 서운함에 자칫 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 있기 십상이다.

사진은 한 동호회에서 단체 하객으로 참석한 뒤 화이팅을 외치며 포즈를 취했다.  
사진은 한 동호회에서 단체 하객으로 참석한 뒤 화이팅을 외치며 포즈를 취했다.  

잊었는지, 왜 못왔을까? 그들과의 나쁜 감정이 가슴 한켠에 남아있는 건 아닐까 등 편치 못한 심사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리라.

진정 축의금 문제가 아닌 그들과의 지난 여정을 잠시 복기해 보노라면 골깊은 감정의 불씨가 도드라지기 일쑤다.

이는 혼주의 입장에서 과거를 되돌아 보는 자아성찰의 시간은 물론 자기관리의 허술함은 없었는지 자문자답해 본다.

이와달리, 하객 가운데 당사자의 애경사를 찾아뵙지 못했거늘 심지어 축의금조차 보내지 못한 축하객에게는 면구스럽기 짝이 없다.

사회적인 상생을 떠나 감사의 축하를 전할 하객은 단순한 감성 안부를 떠나 다시 새겨보는 삶의 바로미터로 길이 남기려 한다.

더군다나 학교를 졸업한지 오랜시간이 지난 어쩌면 주변 이웃보다 더 과거 친구의 축의금 답지는 아픔 없는 채찍과 소리없는 훈육으로 밀려든다.

여러 정황으로 애경사를 못챙긴 데다 어느 하객은 과거 부조금조차 보내지 못한 불찰에도 불구, 주저없이 손내밀듯 건넨 호의는 큰 울림속 가슴 벅찬 조우로 다가온다.

즉, 축의금과 하객, 그리고 화환의 오고간 결과물이 아닌 기꺼이 자리를 빛내주신 하객과의 애경사 교감은 굳이 점수 없는 시험대가 아닌가 싶다.

필자가 처음으로 맞닥트린 아들의 결혼식에 먼길 마다않고 귀중한 시간을 내어준 성원과 보내주신 온정은 이제 마음의 빚으로 간직하려 한다.

다시한번 진심으로 배려와 격려를 보내준 지인과 하객분들의 애경사는 꼭 연락을 요청드리며, 눈 앞의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값진 경험으로 아로새기려 한다.
<권병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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